남북대결의 이면... 김종필 라인이 간첩으로 몰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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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남북 대결에서 남쪽은 대체로 밀렸다. 전쟁을 일으킨 쪽도 북쪽이고, 무장 공비들을 주로 파견한 쪽도 북쪽이다. 남쪽은 반공·멸공·승공은 물론이고 북진통일까지 외쳤지만, 실질적으로 북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한 경제는 북한에 명확히 뒤졌다. 그래서 남북 대결에 투입될 재정적 기반을 확충하는 면에서 남한은 뒤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다가 미국 의회의 <프레이저 보고서>에도 설명된 것처럼 남한 정권은 기업들로부터 자금을 거둬 북한과의 대결이 아닌 남한 정적들과의 싸움에 사용했다. 이런 것은 북쪽과의 대결에 대한 남한의 재정적 투입을 감소시키는 요인이 됐다.
미국의 영향도 컸다. 미국은 동북아 냉전의 '현상 유지'를 희망했다. 이 때문에도 남한의 반공 정책은 구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988년 3월 4일 자 <중앙일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에 추천"된 일을 보도했다. 미국과 보조를 맞추던 영국·서독의 국회의원들이 전두환을 추천했다. 전두환이 북한과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나 아웅산 묘소 테러 등에 정면 대응하지 않고 인내심을 보였다는 게 추천 사유였다. 이 추천은 남한 정권의 '무늬만 반공 정책'에 대한 보상의 측면도 있었다.
남한이 남북 대결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이 있다. 1969년에 발생한 유럽간첩단 사건에서도 이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현역 국회의원, 그것도 집권당 의원이 연루된 이 조작 사건은 한국의 대북 정보당국이 무엇에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1969년은 윤치영 민주공화당 의장서리가 3선 개헌의 필요성을 시사(1.7)하고, 민주공화당에 의해 발의(8.7)된 3선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9.14)하고 국민투표를 통과(10.17)해 3선 개헌의 해로 기억된다. 이해의 5월 14일 자 <동아일보>는 "중앙정보부는 14일 공화당 소속 현직 국회의원을 포함한 관련자가 60여 명에 이르는 '유럽 및 일본을 통한 북괴 대남간첩단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라고 보도했다.
5·16 쿠데타의 책사이자 2인자인 김종필은 3선 개헌에 비판적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공화당 내에 개헌 반대 세력이 결집하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이들을 돌려놓기 위한 설득과 회유, 협박에 나섰다"고 <김종필 증언록> 제1권은 말한다.
6·8 총선을 앞둔 공화당의 전국구(비례대표) 후보 공천을 보도한 1967년 5월 16일 자 <조선일보>는 전국구 후보 김규남(1929~1968) 등을 거명하면서 "이번 인선에 김종필 당의장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평가를 전했다. 이처럼 김종필의 지원을 받아 국회에 들어간 김규남은 2년 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표적이 됐다. 김종필이 3선 개헌을 적극 지지해 여당 내에서 입지가 강했다면 그가 조작 사건에 연루될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김규남이 체포된 것은 1969년 4월 하순이다. 그해 5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김규남의 구속이 공화당의 역학관계의 소산이라는 풍문"이 한동안 떠돌아다녔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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