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건너온 14살 소녀, 그 땅을 지키는 아들

이 뉴스, 어떠셨어요?
한 번의 탭으로 반응을 남겨요 · 로그인 불필요
지난 2일, 전북 임실 관촌면 문화마을에서 오원천의 풍경이 창문으로 보이는 거실에서 김순전 할머니의 한평생 이야기를 채록하였다. 할머니는 보청기를 귀에 끼었고 거동이 불편하며 숨이 차서 말씀 도중 잠깐씩 쉬어야 했다. 할머니는 임실 마당재 농장을 경영하는 김창호(71세)씨의 어머니다. (관련기사: 칠순의 농부 대학생이 트랙터에 사다리 싣고 달리는 까닭)
90세 실향민 할머니의 바래지 않은 기억
1950년 7월, 14살의 소녀가 황해도 장연읍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안내인을 따라 지뢰밭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왔다. 몽금포와 장산곶을 힘들게 거쳐 백령도에서 미군 군함을 탔다. 군함을 탈 때는 가슴까지 차는 바닷물을 밀치며 걸어서 배에 올랐다.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며 며칠 만에 군산항에 도착하였다. 또 며칠 걸려서 임실군 관촌면 용산리에 배치되었다.
정부에서 피난민들을 위한 배집(구호용 가설 주택)을 분배해 주어서 거처를 삼았다. 숟가락이나 솥 하나 없이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 생활 기반이 아무것도 없으니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주민에게 장리쌀을 얻어 생활하는데, 쌀 10말 빌려오면 15말을 갚아야 했다.
대개 봄 춘궁기에 빌려서 가을 수확기에 갚는 경우가 많았는데, 피난민들은 굶주림에 몇 달을 빌려도 같은 비율로 갚아야 해서, 정착 과정이 힘들었다. 장리쌀을 농사지어서 갚을 수 없으니 모내기, 논매주기 등 일을 해주어도 품삯으로 그 빚을 갚기 어려웠다. 소녀는 19살 처녀가 되어 25살의 임실 총각을 만나 임실역 앞 철도관사에서 가정을 꾸렸다. 몇년 후 다시 용산리 농원마을로 가서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았다.
산등성이를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
임실군 관촌면 용산리 농원마을에 정착해 살던 피난민 중 일부 가구는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삶의 터전을 넓히거나 개간을 위해 바로 인근인 '마당재(덕천리 방면 산자락 농장 지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김창호씨가 잠시 말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인 1965년 7월에 현재 마당재 농장 있는 곳으로 이사했어요. 그 무렵 마을의 집마다 설치된 스피커에서 이승만 대통령 서거 뉴스를 들었어요. 누구 땅인지도 모르고 비어 있는 산에서 화전민처럼 살았지요."
마당재 산등성이에 이주한 열세 가구가 기둥 몇 개 세우고 풀잎 엮어 걸쳐 놓은 움막에서 기거했다. 가마니 하나씩 땅바닥에 깔고 식구가 자고, 바깥에 냄비 하나 걸어 놓고 식사를 마련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도, 삽이나 괭이 하나 가지고 산등성이를 억척스레 일구었다. 이들은 산에 불을 질러 개간하지는 않았지만, 거의 화전민 같은 생활이었다.
전체 내용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