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눈감은' 대법원…무거워진 '선례'의 짐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어긋나는 대법원 판결이 잇따라 나오면서, 원·하청 교섭이라는 새로운 노사관계를 안착시켜야 하는 정부의 발걸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입법 근거 상실론'에 대해서는 반론이 만만치 않지만, 결국 개정법 아래에서 '좋은 선례'를 쌓아 판례의 흐름을 바꿔가는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행 4개월 만에 두 번째…'입법 근거' 흔들기 나선 판결
11일 노동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지난 9일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들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이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원청과 대리점(집배점) 소속 택배기사 사이에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관계가 없는 이상, CJ대한통운을 옛 노동조합법상 단체교섭 의무를 지는 사용자로 볼 수 없다는 취지다.
지난 5월 21일 HD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원청의 교섭 의무를 부정한 대법원 판단이 불과 두 달 새 반복됐다. 노란봉투법이 시행(3월 10일)된 지 4개월 만에, 개정법이 명문화한 '실질적 지배력' 법리를 옛 법 사건에서 잇달아 배척한 셈이다.
파장은 판결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 뒤집힌 하급심 판단의 출발점은 2021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 판정이다. 당시 중노위는 교섭요구사항에 대해 원청이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며 처음으로 일반적 원·하청 관계에서 교섭 의무를 인정했고, 이 논리는 이후 노란봉투법의 사용자 조항으로 이어졌다.
대법원이 중노위 판정과 이를 유지한 1·2심을 "법리 오해"라고 판단하자, 일부 언론과 경영계에서는 "노란봉투법의 이론적 토대가 무너졌다"는 주장이 곧바로 뒤따랐다. 옛 법이 적용되는 현대제철·한화오션 등 유사 사건들이 대법원에서 줄줄이 판단을 기다리고 있어, 같은 취지의 판결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입법 근거 상실론'은 사실관계부터 어긋난다는 반박이 나온다. 당시 중노위가 확대한 사용자 개념은 CJ대한통운 사건 하나에서 돌출된 것이 아니라, 2010년 현대중공업 판결에서 대법원 스스로 "근로계약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실질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자는 사용자"라고 인정한 이래 노동위원회와 하급심에 축적돼 온 흐름이기 때문이다.
인제대학교 법학과 박은정 교수는 "CJ대한통운 사건에서만 사용자 개념 확대가 있었던 게 아니라 지배·개입 등 부당노동행위에서는 이미 사용자 개념 확장을 인정해 온 경향이 있었다"며 "노란봉투법은 이 흐름 속에서 헌법상 노동3권 보장이라는 취지를 더욱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거 상실론은 "본말이 전도된 사고방식"이라는 지적이다.
같은 노조법 안에서 사용자 책임을 쟁점별로 쪼개는 대법원 논리 자체가 모순이라는 비판도 있다.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오민규 연구실장은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원청에 사용자 책임을 지게 하면서도 단체교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며 "부당노동행위도, 단체교섭도 모두 노조법상 개념인데 권리를 쪼개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판결로 노란봉투법 자체가 무효화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건은 개정법 시행 전인 2020년 교섭 거부가 문제 된 사안이어서 옛 노조법이 적용됐을 뿐, 지난 3월 10일 이후 발생한 원·하청 교섭 분쟁에는 '실질적·구체적 지배력'을 사용자 개념에 명시한 개정법이 그대로 적용된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 관계자 역시 "이번 판결은 개정법 전 상황에 대한 법리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문제는 개정법 이후…'협소 해석' 시그널 우려
다만 노동법학계가 주목하는 것은 판결 그 자체보다 판결이 보내는 '신호'다. 앞으로 법원이 개정법 적용 사건에서도 '실질적·구체적 지배력'을 최대한 좁게 해석하려 들 수도 있다.
박 교수는 "노조법 2조를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지배력 개념을 협소하게 해석하려는 시도가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2차·3차 하청이나 다수 사용자 관계 등 다양한 고용구조로 확장돼야 할 사용자 개념이 초입부터 좁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잇따른 판결에 대해 "법원이 노란봉투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받는다"며 "법이 개정됐음에도 이런 판결이 연달아 나와 학계에서도 당황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결국 개정법 아래에서 성공적인 교섭 사례를 빠르게 쌓아, 잘못된 판례를 '덮어쓰라'고 조언한다. 대법원 스스로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개정법 적용 사건에는 노동3권의 실효적 보장이라는 입법 목적에 맞게 사용자 개념을 해석해야 한다고 여지를 남긴 만큼, 판단의 재료가 될 현장의 실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오 실장은 "사용자들은 이런 판결이 나오면 '법이 바뀌었어도 소송을 걸며 기다리겠다'는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크다"며 "노조법 2조 개정 이후 새롭게 시작된 교섭에서 좋은 사례를 만들어내는 것이 잘못된 판례를 뒤집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부가 모범 사용자로서 공공부문에서 먼저 교섭에 나서 민간으로 확산시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예를 들었다.
이에 따라 정부도 부담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공공부문 선도 교섭을 공언하고도 아직 가시적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법원의 소극적 태도까지 겹치면 노조법 2조 개정이라는 핵심 노동정책의 성과 자체가 무색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정법 시행 후 첫 원·하청 교섭 분쟁이 법원 판단을 받게 될 때까지, 정부와 노동계가 어떤 선례를 만들어내느냐가 노란봉투법의 실질적 운명을 가를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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