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내 편만 들어주는 사람
상추를 씻는데 물이 뚝 끊긴다. 어? 이게 뭐지 싶어 다시 수도를 튼다. 물이 나오지 않는다. 옆에서 밥을 먹던 아들이 "오늘 단수라고 했잖아요"라고 한다. 아차, 싶다. 엘리베이터 점검으로 6시간 동안 단수, 정전이라는 글을 안내문에서 본 듯도 하다. 폰을 보니 배터리가 20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 화장실을 못 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배도 아픈 것 같다. 엄청 더울 텐데 에어컨이 안 돌아간다니 상상만으로도 눈앞이 캄캄하다.
모처럼 일본에서 온 아들과 손주는 또 어쩌나. 카페를 갈까 도서관을 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방법이 없다. 급한 대로 가방을 챙겨 택시를 탄다. 20분 거리에 있는 친정어머니네 집으로 향한다. 비좁은 편이긴 하지만 어머니네에서는 화장실도 갈 수 있고 에어컨 바람도, 충전도 가능하다.
스무 평 남짓한 좁은 빌라에 4대가 모였다. 평소 에어컨을 잘 틀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빵빵하게 어어컨을 틀고 선풍기까지 풀가동 해 놓으셨다. 냉장고를 다 털어서 먹을거리를 내놓고는 증손주의 환심을 사려 하신다. "주세요, 고맙습니다" 같은 인사도 못하면 어떡하냐며 열심히 가르치신다. 엄마가 일본 사람인데 아무렴 일본어를 먼저 배우겠지라는 말을 할까 하다가 관둔다. 어머니가 그럴 모르실 리가 없지 않겠는가. 걱정에 노파심에 하신 말씀이겠지.
하긴 나도 얼마전 손주의 사진을 보고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부쩍 자란 손주의 옷차림과 머리스타일에서 일본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있었나 보다.
한국어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손주에게 어머니는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놓는다. 처음에는 멀뚱멀뚱하던 손주가 어느새 증조할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웃기까지 한다. 나는 신기해서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 워낙에 재미 없는 할머니인 나와는 다르게 증조할머니는 유머가 넘치고 어떤 때는 어린애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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