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 같은 돌이 이어준 천년의 인연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개태사 극락대보전 안.
석조여래삼존입상 앞으로 다가가자 회백색 바탕에 검은 알갱이가 촘촘히 박힌 돌결이 눈에 들어온다. 흑운모를 품은 화강섬록암이다. 차로 20여 분 떨어진 관촉사 은진미륵에서도 똑같은 돌결을 만날 수 있다.
두 불상은 고려 초 서로 다른 시기에 조성됐다. 하나는 후삼국 통일 직후 왕건이 세운 개태사의 삼존불이고, 다른 하나는 광종 때 완성된 관촉사의 은진미륵이다. 최근 보존과학 연구는 이 두 불상이 같은 계통의 화강섬록암으로 만들어졌음을 밝혀냈다. 왕조의 시작과 안정이라는 서로 다른 시대적 염원이 같은 돌 위에 새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단서다.
문헌 따라가 보니... 별개의 이야기 아니었다
문헌을 따라가 보면 두 사찰은 처음부터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태사의 시작은 태조 왕건의 지은 발원문인 '신성왕친제개태사화엄법회소(神聖王親製開泰寺華嚴法會疏)''에 남아 있다.
936년 후백제를 평정한 왕건은 940년 개태사를 완공하고 화엄법회를 열었다. 그는 발원문에서 "부처님의 도움에 보답하고 산신령의 음덕에 응하기 위해 절을 세웠다"고 밝히며 산 이름은 천호(天護), 절 이름은 개태(開泰)라 했다고 적었다. 하늘의 보호 아래 태평성대를 연다는 의미다.
고려 문인 이규보도 '동국이상국집-개태사 조전원문'에서 개태사를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태조 진전에 제사를 올리던 국찰로 기록했다. 경주 반란을 평정하러 떠나며 태조 진전에 발원문을 올렸다는 대목은 이 절이 왕조를 지키는 상징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고려사'는 "개태사를 세울 때 사치가 극도에 달했다"고 적었다. 왕조 창업 직후의 거대한 국가 불사가 얼마나 막대한 인력과 재정을 투입한 사업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관촉사의 전승은 조금 다르다.
1743년 조선 후기 권륜이 지은 <관촉사사적기>에 따르면 968년 사제촌의 한 여인이 반야산 서북쪽에서 고사리를 캐다 아이 우는 소리를 듣고 다가가자 거대한 바위가 땅 밖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조정은 이를 불상을 세우라는 징조로 받아들였고 승려 혜명이 석공 100여 명과 함께 970년 공사를 시작해 1006년 완성했다고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 문인 이색의 <목은집>, 고려 말 승려 무외의 <용화회소>에도 이 거대한 석불의 존재가 기록돼 있다.
특히 '관촉사사적기'는 불상이 "반야산 서북쪽에서 제작돼 동쪽으로 옮겨졌다"고 적어 채석과 운반 경로까지 비교적 구체적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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