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일으킨 시아버지의 말씀 속 단 두 글자

꽃을 사듯 책을 사고, 책을 사듯 꽃을 사던 때가 있었다. 일부러 서점에서 기다리던 책 한 권을 사고, 때때로 나를 위해 꽃집에 들러 작은 꽃다발 하나를 사곤 했다. 그런 발품에는 내 마음과 삶을 소담하게 채우는 힘이 있었다.
이제는 소리책과 오디오북이 더 익숙해졌다. 꽃 역시 특별한 날이 아니면 나를 위해 선뜻 사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꽃과 멀어져 지내던 어느 날, 친구에게서 뜻밖의 꽃다발 선물이 도착했다. 포장을 풀어 화병에 꽂고 물을 채워 주었다. 손끝으로 꽃봉오리를 가만가만 만져 보았다. 겹겹이 포개진 꽃잎이 마치 장미를 닮은 것 같았다.
'이 꽃은 모두 장미일까?'
사진을 찍어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장미 외에도 다른 꽃이 있다며 낯선 이름들을 알려 준다. 리시안셔스, 스프레이 장미, 알스트로메리아. 익숙지 않은 이름들이었다. 하마터면 몽땅 장미로 부를 뻔했다. 꽃 하나에도 저마다의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괜스레 마음에 오래 남았다.
9년 전 중증 시각장애인이 된 후 내 이름이 낯설어지는 시절을 보냈다. 안에서는 도무지 열 방법이 없는 손잡이 없는 방.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계절의 감각마저 흐려지던 때였다. 더는 내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유로 직장에 휴직을 신청했다. 나는 바깥의 채도와 다른 색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익숙했던 내 이름도 세상 속에서는 함께 희미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긍정적이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의료 사고 이후에는 그 말에도 의문이 생겼다. 웃는 날 보다 무표정한 날들이 많아지자 정말 내가 그런 사람이 맞기는 했는지, 대책 없는 생의 어둠 앞에서는 좋은 날의 기억들마저 함께 흐려지는 것 같았다.
내 이름 위로 새로운 현실들이 덕지덕지 붙었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어려운 사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 빛을 향해 더는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 불청객 같은 정체성들이 내 이름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한 걸음 내디딜 힘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을까? 사실 탈출이나 극복이라는 말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삶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갔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자연스레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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