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노" 논란에 PD 해고 요구?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말은 사전 속에만 있지 않다. 말은 사용되는 자리에서 의미를 얻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 안에서의 그 사용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것을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절대 명제로 말하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비록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 단서까지 포함해 읽어야 한다. 말의 의미는 낱말 하나의 형태가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능으로 사용했는가 속에서 드러난다.
언어화용론도 같은 사실을 말한다. 말은 단순히 화자의 머릿속 의도를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다. 말은 듣는 사람에게 도달하면서 의미를 형성한다. 화자가 아무리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해도, 수용자가 그 말이 놓인 상황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조롱이나 모욕으로 받아들였다면 그 해석은 가볍게 밀어낼 수 없다. 말의 의미는 화자의 의도, 수용자의 해석,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배재고 야구부의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구호가 왜 문제인지 분명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커피 마시러 가자"는 말이 아니었다. 광주제일고와의 경기에서, 5·18을 떠올리게 하는 "탱크데이"를 함께 외쳤다. 얼마 전 스타벅스의 5·18 관련 판촉 논란이 있었고,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한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서 "스타벅스 가야지"는 더 이상 중립적인 말일 수 없었다. 그것은 5·18의 국가폭력과 희생의 기억을 끌어와 상대를 조롱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일부 정치인들은 "학생들이 스타벅스 가자고 한 게 왜 문제냐", "그 정도 야유도 못 하느냐", "표현의 자유 아니냐"고 말한다.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이것은 말의 문자적 뜻만 붙잡고 실제 사용의 맥락을 지우는 억지다. "스타벅스 가야지"가 문제인 것은 스타벅스라는 단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광주제일고를 상대로, 5·18을 암시하는 "탱크데이"와 함께, 집단 응원 구호로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다. 이것을 모른다면 공인의 언어 감각이 부족한 것이고, 알고도 그렇게 말한다면 비극 조롱을 정치적으로 방조하는 일이다.
5·18은 광주만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헌법적 기억이다. 그 기억을 경기장의 야유로 사용한 순간, 말은 장난이 아니라 비극 조롱이 된다. 조롱은 피해자의 고통을 지우고, 혐오는 그 고통을 다시 공격한다. 정치인은 이런 문제 앞에서 더 엄격해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를 살피기보다 가해자의 말을 "표현의 자유"로 감싸는 정치인은 민주주의의 언어를 모르는 사람이다. 표현의 자유는 역사적 학살을 조롱할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책임과 함께 있을 때 민주주의의 가치가 된다.
최근 교실에서 '운지', '부엉이바위', 'MC무현', 5·18 조롱,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화화가 퍼지고 있다는 증언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이 표현들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한 인간의 죽음을 놀이로 만들고, 역사적 비극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공동체의 기억을 훼손하는 언어폭력이다. 교사들이 이를 바로잡으려 할 때 "정치 편향"이라는 공격을 걱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위기다. 죽음을 조롱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일은 특정 정파를 지지하는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시민을 기르는 교육의 기본이다.
"무섭노"에 대한 문제제기와 '낙인'의 차이
그렇다면 아이돌 그룹 리센느 원이의 "무섭노"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여기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노'라는 형태만 보면 안 된다.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떤 기능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영상에서 PD가 먼저 "무섭노"라고 했고, 원이는 그 말을 받아 "무섭노. 조명부터 무서운데"라고 답했다. 이 말에는 특정 인물의 죽음도, 5·18도, 지역 비하도, 사회적 약자 조롱도 직접 들어 있지 않다. 불 꺼진 방 앞에서 나온 공포 분위기 속 감탄과 맞장구에 가깝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둘러싼 불편함을 모두 "예민함"으로 밀어낼 수는 없다. 일베가 '노'를 노무현 전 대통령 조롱의 암호처럼 사용해온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말끝의 '노'는 단순한 어미가 아니라 상처를 건드리는 소리일 수 있다. 화용론적으로 말하면, 화자의 의도가 전부가 아니다. 수용자가 그 말을 어떤 사회적 기억 속에서 듣는지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무섭노"가 누군가에게 불편하게, 심지어 혐오의 흔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문제제기 자체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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