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 폐허 속에서 부르는 '축복의 노래'

무대 한가운데 끊어진 길이 비스듬하게 솟았다. 폭발의 충격으로 들려 올라온 아스팔트, 아니면 무너진 문명이 남긴 상흔 같기도 하다. 흙먼지가 내려앉은 바닥과 찢어진 철망, 말라붙은 나뭇가지로 보아 여기가 황무지임이 분명하다.
그 폐허 위로 1960년대 낭만적인 노래가 흐른다. 가재도구를 실은 리어카를 끌며 게사쿠와 교코가 들어온다. 하늘이 번쩍일 때마다 교코는 또 미사일인지 묻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고장 난 컴퓨터가 남은 미사일을 쏘아 올린다. 빨간빛은 수소폭탄이고, 별똥별처럼 지나가는 것은 리튬폭탄이다. 누군가의 죽음과 도시의 소멸을 알리는 섬광이 어느새 익숙한 일상이 됐다. 그런데 이토록 참혹한 세계를 걷는 두 사람은 좀처럼 비장해지지 않는다.
세계는 끝났는데 만담은 계속된다
게사쿠와 교코는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에도 티격태격한다. 말을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대사의 중간을 제멋대로 건너뛰는 '중략 만담'이 멈추지 않는다. <호기우타>의 첫 번째 역설은 여기에 있다. 핵전쟁 이후의 종말을 다루지만 관객에게 절망을 강요하지 않는다. 울어야 할 것 같은 순간에 웃음을 밀어 넣고, 웃음에 마음을 놓으려 하면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하나의 말과 몸짓 안에 유머와 처연함이 동시에 스며든다.
붉은빛 아래 세 배우가 그릇을 들고 무대를 뛰어다닌다. 그 모습은 유랑극단의 광대놀이를 연상한다. 게사쿠와 교코가 머리에 빨간 천을 두르고 조명 앞에 나란히 서는 장면도. 우스꽝스러운 차림과 지나치게 진지한 얼굴 사이에서 웃음이 교차한다. 하지만 배우들이 뛰어다니는 발밑에는 부서진 도로와 황무지가 있다. 이 작품의 웃음은 절망을 잊게 하는 웃음이 아니다. 절망에 완전히 짓눌리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만든 숨구멍이라면 맞을까.
두 사람 앞에 나타난 야스오는 원본만 있으면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다. 고구마말랭이 한 조각만 있으면 주머니에서 몇 개든 꺼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복제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함께 보낸 시간도 다시 만들 수 없다. 물건은 되살릴 수 있지만 상실은 복구할 수 없다. 교코가 몸에 걸고 다니는 작은 라디오도 그렇다. 건전지가 없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다. 설령 건전지를 구해도 방송국이 남아 있는지는 모른다. 교코는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손사래를 친다. 전원을 켜면 어느 주파수에서든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이라고 믿고 싶단다. 교코가 원하는 것은 방송이 아니라, 세상 어딘가에 자신들 말고도 누군가 살아 있다는 확신이다.
교코(정다연 역)는 무대의 감정 온도를 가장 크게 흔든다. 작은 라디오를 몸에 건 채 무대를 누비고, 정면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다음 순간 하늘을 향해 몸을 젖힌다. 천진하고 엉뚱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게사쿠(이경민 역)는 능청과 허세로 공포를 가린다. 미사일과 방사능을 아무렇지 않게 설명하고, 관객이 보이지 않는 무대에서도 만석이라고 우긴다. 그러나 푸른빛 아래 홀로 허공을 바라보는 순간 광대의 허세는 걷히고 피로와 두려움만 남는다. 야스오(우범진 역)는 무엇이든 복제하는 능력을 지녔지만 세상의 규칙을 처음 접한 아이처럼 서툴다. 그는 자신을 불사신이라 말하지만,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세 사람은 서로를 잘못 이해하고 자주 엇나간다. 그런데도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호기우타>가 보여주는 공동체는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관계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곁을 떠나지 않는 관계다. 또한 전라도 사투리는 이 관계에 생활의 온도를 더한다. 일본 원작의 지방 언어를 한국 관객의 귀에 옮기면서 폐허를 먼 나라의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땅 가까이 끌어당긴다. 일부 대목에서는 억양이 먼저 들리기도 하지만, 대화에 속도가 붙으면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 밥상머리에서 다투는 듯한 친밀감이 생긴다. 이 온기 덕분에 종말은 관념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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