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삽화부터 남다른, '거대한 사고 실험' 같은 책
<픽션들>이라는 제목은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이름도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었다.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논술 지문이나 인문학 관련 글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접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과 인식, 현실과 허구를 다루는 문제를 설명할 때 보르헤스가 자주 언급되곤 했다. 다만 그의 작품을 온전히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책을 펼치기 전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표지 삽화였다. 오른손은 연필로 왼손의 소매를 그리고 있고, 왼손 역시 오른손의 소매를 그리고 있다. 서로를 그리는 두 손은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순환 구조를 만든다. 현실과 허구가 서로를 만들어내고,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흐려지는 보르헤스의 세계를 상징하는 듯했다. 제목보다 먼저 표지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고, 그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게 만들었다.
이야기보다 오래 남은 숨겨진 질문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수필가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서문과 각주를 여러 번 되짚어 읽어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철학과 문학 이론, 역사와 상상이 뒤섞인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작품 하나를 읽을 때마다 이야기보다 그 안에 숨겨진 질문이 더 오래 남았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였다. 프랑스 작가 피에르 메나르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베끼려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이 지난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이 세르반테스와 똑같은 문장을 다시 써내려 하려 한다. 결과적으로 완성된 문장은 원작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독자들은 그 글을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는다.
보르헤스는 이 기묘한 설정을 통해 문학의 의미가 글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문장도 누가, 언제, 어떤 시대에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생각해 보면 현실도 비슷하다. 같은 뉴스 기사, 같은 사건, 같은 영상이라도 사람들은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는 사실을 읽는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시대를 함께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빌론의 복권" 역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복권 제도였지만 점차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체계로 변한다. 돈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처벌과 감옥, 심지어 죽음까지 복권으로 결정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누구도 규칙을 알 수 없게 되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이 작품을 읽으며 인간이 생각보다 많은 우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미래를 예측하려 애쓰지만 취업, 만남, 건강, 사고처럼 삶의 중요한 순간에는 늘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이 개입한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중 상당수는 철저한 계산의 결과라기보다 우연한 만남이나 예기치 못한 선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질서와 합리성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역시 사실은 불확실성과 우연 위에 서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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