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피해자 편에 선 기술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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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은 언제나 비슷했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항상 무언가를 보여줄듯이 말한다. 인터넷 검색창에 몇 글자를 치고, 화면을 한두 번 넘기고, "이거 봐" 하며 옆 사람에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핸드폰은 돌아오지 않았다. 검색창을 보던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SNS로 넘어갔다. 누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는지, 누구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는지, 어떤 댓글을 남겼는지. 그 다음은 앨범이었다. 하루의 사소한 장면들이 저장된 곳. 음식 사진, 거리 사진, 영수증 사진, 친구와 찍은 사진. 그 모든 사적인 기록들이 그의 손끝에서 빠르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날은 손가락이 한 장면 앞에서 멈췄다. 아내가 몰래 남겨둔 기록이었다. 폭력을 증명하기 위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떨리는 손으로 저장해둔 영상이었다.
남편의 얼굴이 굳어졌고 숨은 거칠어졌다. 휴대폰은 곧장 벽으로 날아갔고, 액정은 바닥에서 깨졌다. 분을 이기지 못해 휴대폰을 내려치는 망치질 속에서, 어렵게 남겨둔 증거도 함께 사라졌다. 차라리 휴대폰만 부서졌다면 다행이다. 폭력은 그날도 되풀이됐다. 증거를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더 큰 폭력의 이유가 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어느 집의 풍경. 누군가는 피해자에게 '왜 그렇게 당하고만 있었느냐'며 쉽게 질타할지도 모를 이 장면 앞에서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는 오래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물었다. 피해자는 왜 증거를 남기고도 더 위험해져야 했을까. 폭력을 입증하려 붙잡은 휴대폰은 왜 피해자를 지키지 못했을까. 가해자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왜 그 안의 기록은 보호의 증거가 아니라 또 다른 폭력의 빌미가 되어야 했을까.
그 질문을 붙잡고 2년. 석사학위 논문 '친밀관계폭력 피해자를 위한 디지털 증거 프레임워크 연구'를 발표한 조경숙 대표는 "기술 설계의 출발 질문을 피해자에게 둬야한다"며 "피해중심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피해중심기술. 낯선 말이지만 뜻은 분명하다. 주로 사건이 벌어진 '뒤'를 향해 있었던 기존의 기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폭력이 벌어지는 '동안' 피해자가 증거를 모으고 숨기고 지킬 수 있도록 설계된 기술.
실제로 그는 논문을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가 증거를 안전하게 모으고, 들키지 않게 숨기며, 훼손되지 않은 상태로 지킬 수 있도록 단계별 설계 원칙을 제안했다. 나아가 이러한 설계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대안을 제시했는데, 계산기로 위장한 애플리케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평소에는 화면에 숫자판만 떠 있는 그냥 계산기지만 미리 정해 둔 수식을 입력하면 숨어 있던 화면이 열리고, 거기에 그날의 날짜와 상황, 그리고 사진을 저장할 수 있다. 저장된 사진은 그대로 남지 않고 꽃이나 풍경 같은 다른 이미지 속으로 숨으며, 나중에 정해진 암호를 넣어야만 원래 모습으로 다시 꺼낼 수 있다. 가해자가 휴대폰을 빼앗아 열어 봐도, 끝까지 보이는 것은 계산기뿐이다.
지난 17일, 피해자의 스마트폰을 다시 피해자의 편으로 돌려놓으려는 기술활동가, 조경숙 도토리랩스 대표를 만났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앞선 서두의 상황은 특별한 누군가에게만 닥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매일 쥐고 있는 평범한 휴대폰에도 이같은 비대칭이 숨어 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캡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빠져나간 얼굴 한 장은 딥페이크 성범죄의 재료가 될 수 있다. SNS에 별생각 없이 올린 일상이, 기본 공개 범위와 공유 설정에 따라 낯선 사람에게까지 닿을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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