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판이 깬 장르 공식, 구로사와 기요시의 존재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뱀의 길>이 개봉한다. 2024년 프랑스에서 스스로 리메이크해 찍은 작품이 아니라, 1998년 원작이다. 한국서 개봉 기회를 잡지 못했던 이 영화가 28년 만에 한국 관객과 만나는 건 최근 구로사와 기요시를 새롭게 조명하는 흐름의 일환이겠다. 올해 초 신작 <차임>이 개봉한 데 이어, 최근 <회로>, 다시 <뱀의 길>까지 이어지는 개봉으로 한국 관객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을 극장서 만나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게 됐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공포 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는 폭넓은 필모그래피를 그려왔다. 도리어 각 장르의 전형적 문법에서 탈피해 장점은 취하면서 독자적 가능성을 실험하는 태도가 높이 평가됐다. <뱀의 길> 또한 그와 같은 작품. 범죄물의 외양을 가진 이 영화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독자적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뱀의 길>은 범죄물이다. 영화는 미야시타란 사내의 복수극으로 출발한다. 영화 시작점에서 미야시타(카가와 테루유키 분)가 한 남자를 납치한다. 오츠키(야나기 유레이 분)라 불리는 이로, 야쿠자 조직의 조직원인 듯하다. 혼자서 불량배를 납치하기 어려운 때문일까. 미야시타는 니지마(아이카와 쇼 분)란 이의 도움을 받아 납치에 성공한다. 오츠키를 데리고 한적한 창고로 온 이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은 뒤 헤어진다.
복수에 나선 아버지
미야시타가 오츠키를 납치한 건 딸에 대한 복수 때문이다. 어린 딸이 납치돼 살해된 채 발견된 것이다. 그 몸에 난 수십 군데 상처는 생전 그녀가 고문을 받았단 걸 보여준다. 미야시타는 그에 대한 복수로 직접 살인자를 찾아 나선 것이다. 오츠키가 그 후보인데, 사실 정확한 증거랄 건 없다. 오츠키에게 자백을 받아내고 복수하는 것, 그것이 그에게 남은 과제가 된다.
문제는 오츠키가 실제 범행을 벌인 이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부인한다. 확증이 없는 만큼 쉽게 죽일 수도 없는 일이다. 영화는 그로부터 또 다른 이, 다시 다른 이로 이어지는 납치와 복수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그로부터 타깃은 야쿠자 조직의 수뇌부로 향하는데, 이들의 기습이 성공하고 상당한 타격을 입히기까지 한다. 아이를 죽인 이를 찾아 복수하기 위해 이뤄지는 납치와 살인이 반복된다. 도대체 야쿠자 조직은 왜 미야시타의 딸을 고문하고 죽인 걸까. 해소되지 않는 의문 주변에 하나둘 의혹들이 피어난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 또는 유대 있던 아이를 잃은 어른이 복수며 구출을 시도하는 이야기는 흔하다. <테이큰>과 <아저씨>의 차이는 납치된 아이가 친딸이냐 그저 친한 아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두 영화 모두 전직 특수 요원이라는 이력을 가진 이가 주인공이란 점에서 전격적 액션물로 필요한 제반 조건을 갖췄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맨 온 파이어>는 경호원이 지키던 어린 아이를 구하기 위한 이야기로 또한 비슷하다. 이와 비슷한 작품의 수는 미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존 윅> 시리즈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테다. 변주라면 여자아이가 아닌 기르던 개의 죽음이 도화선이 됐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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