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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고을 '양지현'의 영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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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고을 '양지현'의 영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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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읍은 영동고속도로 양지IC를 중심으로 한 사통팔달 교통 요지이자 평온한 도농복합지역으로 익숙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지는 현재의 용인시 양지면·원삼면·백암면 전체와 안성시 고삼면 일대까지 넓은 영토를 거느렸던 독립 군현, 바로 '양지현(陽智縣)'이었다. 한양에서 삼남(三南)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嶺南大路)의 핵심 거점으로서, 당대 용인현과 어깨를 나란히 했거나 물류와 상업 면에서는 오히려 능가했던 번영의 고을이었다.

현재 양지읍행정복지센터 앞마당에는 과거 양지현을 거쳐 간 목민관들의 치적을 기리는 송덕비와 선정비 8기가 무리를 이루어 서 있다. 이 석비(石碑) 군락은 양지현이 인근 군현에 뒤처지지 않는 행정적 위상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화려했던 고을의 중심인 관아(官衙) 건물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그 규모가 어떠했는지 아는 이는 드물다. 문헌과 지도를 통해 잊힌 양지현의 발자취를 추적하고, 비전을 짚어본다.

양량부곡에서 독자적 군현으로, 500년 독립 행정의 역사

양지의 뿌리는 고려시대 수주(水州, 현 수원)에 속했던 특수 행정 집락인 '양량부곡(陽良部曲)'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곡 주민들은 일반 군현에 비해 더 많은 세금 부담과 신분적 제약을 받았으며, 독자적인 수령 없이 상위 군현의 통제를 받았다.

전환점은 1399년(정종 1년)에 찾아왔다. 민생 안정과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군현제를 정비하던 조정은 양량부곡을 '양지(陽智)'로 개칭하고 현(縣)으로 전격 승격시켜 감무(監務)를 파견했다. '햇볕이 잘 드는 슬기로운 땅'이라는 뜻의 양지는 아늑한 지세와 풍요로운 미래를 염원한 이름이었다.

이후 1413년(태종 13년) 감무가 현감(縣監)으로 격상되면서 본격적인 지방관 통치가 시작됐다. 이때 고을의 중심지, 읍치를 광주목 관할의 추계향(秋溪鄕, 현 양지면 추계리)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죽산군 관할의 고안·대곡·목악·제촌 등 4개 부곡을 통합 흡수했다. 이로써 양지현은 사방으로 경계를 넓히며 경기 남부의 독립 군현으로서 면모를 완벽히 갖추게 됐다.

관찬 사료가 증명하는 조선시대 양지현 치소 규모와 '개방형 구조'

조선 전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성곽(城郭) 조를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된다. 양지현은 "성곽이 없다(無城)"고 기록돼 있다. 수원화성이나 해미읍성처럼 인위적인 석축 성벽으로 고을 전체를 둘러싸지 않은 것이다. 대신 고을의 진산(鎭山)인 정수산(定水山)을 천혜의 장벽으로 삼고, 그 산자락 아래 관아와 민가가 자연스럽게 펼쳐진 '개방형 구조'를 취했다. 이는 영남대로라는 거대 교통망을 끼고 있는 고을 특성상, 외부 물류의 진입과 인구 이동이 막힘없이 이루어지도록 설계된 실용적 배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양지현 관할 경계는 동쪽으로 이천까지 8리, 서쪽으로 용인까지 10리, 남쪽으로 양성까지 35리, 북쪽으로 광주까지 10리에 이르렀다. 영토의 절대적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대동맥인 영남대로가 읍내를 관통했다는 점이다. 한양과 삼남 지방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덕에 일 년 내내 사람과 물화가 넘쳐났고, 영남 선비들의 과거 길과 전국 보부상들의 필수 이동로로서 상업적 번영을 구가했다.

그렇다면 멸실된 양지현 관아의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조선시대 유교적·풍수지리적 공간 배치 법칙과 근대기의 지형 변화를 종합할 때, 그 위치는 현재의 양지초등학교 운동장과 해밀도서관, 옛 양지면사무소 부지 일대로 추정된다.

<여지도서>와 <양지현읍지> 공해(公廨) 조의 기록을 보면, 당시 관아의 구체적인 건축 규모와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수령의 집무 공간인 동헌(東憲)을 비롯해 왕권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신 객사(客舍), 그리고 지방 행정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던 향청(鄕廳)과 작청(作廳) 등이 이곳을 중심으로 밀집해 있었다.

조선시대 용인현을 압도했던 양지현의 상업 경제

18세기 중반 기준 양지현의 공식 등재 인구는 2330호, 9560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중반에 이르러 영남대로를 기반으로 한 상설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실제 상주 인구는 3000호, 1만3000명 선에 육박하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인근 용인현의 규모를 웃도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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