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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 전 옥중 결혼...일본 내각 총사퇴 부른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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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선고 전 옥중 결혼...일본 내각 총사퇴 부른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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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의 법정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 판검사 등 재판 관계자들을 대경실색하게 만든 일본 여인이 있었다. 천황 부자 암살을 기도한 대역죄 범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였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동지이자 남편 박열도 판사를 꾸짖고 조롱했지만 당시 그런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수두룩했다. 그러나 충직한 황국신민(皇國臣民)인 일본인이, 그것도 '순종적이어야 할' 여성이 뭇사람이 보는 앞에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천황제를 비판한 것은 처음이었다. 방청석에서는 '배신자' 소리가 터져 나오고 곳곳에서 한숨과 탄식이 들려왔다.

1926년 2월 26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이들 부부의 첫 공판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피고인 박열은 조선 왕조 관복 차림으로 법정에 등장했다. 가네코 후미코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었다. 판사가 이름을 묻자 박열은 상대를 조롱하듯 일본어 욕설 '바가야로'와 비슷한 '바쿠야루(박열)'라고 답했고, 가네코는 한국식 발음으로 남편 성을 따서 '박문자'라고 당당히 말했다.

가네코는 "내가 실패한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면서도 "다만 그 실패가 나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실패가 아니었다는 점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기쁨 하나만으로도 나의 모든 손실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너희와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한 박열과는 사뭇 입장이 달랐으나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하늘을 찌를 듯한 기개는 어금버금했다.

가네코란 일본 여인은 어떻게 식민지 청년과 의기투합해 조선 독립 투쟁에 몸을 던지게 됐을까. 더욱이 자신의 동족이 하늘처럼 떠받드는 천황 일가를 암살할 계획에까지 가담하게 됐을까.

청주 고모집에서 살면서 조선인에 연민 느껴

가네코는 1903년 1월 25일 일본 도쿄 근교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데다 둘 다 사생활이 문란해 어린 시절을 힘겹게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 집과 외가 등을 전전하며 천덕꾸러기로 자랐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912년 가을부터 7년간 충북 청주(현 세종시 부강면)의 고모 집에 맡겨져 하녀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일제의 폭정에 신음하던 조선인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꼈다. 1919년 3월에 터진 만세 운동을 보고는 자유를 향한 조선인의 열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19년 4월 귀국해 외가에서 지내다가 1년 뒤 독립을 선언했다. 도쿄에서 신문 가판원, 노점상과 행상, 식모살이, 오뎅집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하며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 등에 다녔다. 당초 온갖 고생을 무릅쓰면서도 고학을 한 목적은 출세를 위해서였으나 책을 읽고 사람들과 사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구세군을 통해 기독교를 접했다가 종교는 사람을 속이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겨 발길을 끊었다.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품었지만 변혁이 도래했다 해도 권력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민중은 여전히 권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아나키즘에 빠져들었다. 그는 통치 체제나 권력 기구를 불신했고, 일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옥중 수기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모든 운명에 감사한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적 동지들을 찾아 교류하다가 조선인 유학생들과도 어울리게 됐다. 1922년 2월 정우영의 하숙방에 들렀다가 조선인 유학생 잡지 '청년조선'의 교정지를 보게 됐다. 그 가운데 '개새끼'라는 독특한 제목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허무주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박열의 시였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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