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에서 온 황금빛 차, 장마철에 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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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의 습기인지 그저 계절의 열기인지 모를 눅눅함이 공기 중에 서서히 배어들기 시작하는 여름의 길목입니다. 매미 소리도 슬슬 시작된 것 같고요. 이맘때면 찻자리를 준비하는 마음에도 작은 주저함이 생깁니다. 더위를 단번에 날려버릴 서늘하고 청량한 자극이 필요한가, 아니면 오히려 이열치열로 몸속 깊은 곳까지 데워줄 화끈함이 필요한가.
청량함을 화끈하게 마시기로 결정한 뒤 제가 조심스레 꺼내든 찻잎은 상큼하고 향기로운 다질링 첫물차(Darjeeling 1st Flush)입니다. 눈 덮인 히말라야의 매서운 겨울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틔워낸 봄의 첫 찻잎. 이 여리고 찬란한 잎을 대체 어떤 그릇에 우려야 할까, 문득 다구장 앞에서 즐거운 고민에 빠졌습니다. 투명한 유리 다구에 우려내어 첫물차 특유의 쨍하고 화사한 수색을 직관적으로 감상할까? 아니면 오랜 시간 차를 머금어 온 자사호에 찻잎을 툭 얹어내어, 흙과 세월이 길들인 둥글고 부드러운 맛으로 풋내를 조금 눌러서 마실까.
한참을 서성이던 저의 최종 선택은, 다름 아닌 스누피가 그려진 티포트와 찻잔이었습니다. 언뜻 장난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잔의 경우 코발트빛 안료로 그림까지 들어간 어엿한 진짜 청화백자(靑華白磁)랍니다. 비록 티포트의 그림은 전사 기법으로 구워졌지만, 하얀 바탕 위에 푸른색 선으로 그려진 스누피는 청화 특유의 맑고 단아한 느낌을 제법 훌륭하게 자아내지요. 유리의 날 선 아슬아슬함도 아니고, 자사호의 한없이 무거운 묵직함도 아닌 바로 그 중간 지점. 차 본연의 향을 왜곡 없이 맑게 비추면서도, 뜨거운 온기를 단단하고 듬직하게 품어주는 도자기가 주는 다정함에 마음이 이끌렸거든요.
다구를 세팅하고 찻물을 끓이면서 냉장고를 열어 야심 차게 준비한 티푸드를 꺼냈습니다. 샴페인처럼 찰랑이는 다질링에 어울릴 달콤한 짝꿍으로 낙점된 것은 바로 슈크림빵입니다. 동네 빵집에서 늘 단팥빵과 소보로빵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 빵 맞아요. 적당한 두께의 부드러운 빵 껍질 속에 노랗고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이 묵직하게 들어찬, 제가 어린 시절부터 스누피만큼이나 애정해 온 고전적인 디저트입니다. 크게 한 입 베어 물어 입안 가득 눅진한 달콤함을 채운 뒤, 따뜻한 다질링을 한 모금 넘겨 넘치는 단맛을 화사하게 씻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모네 정원을 닮은 차
찻잎이 뜨거운 물을 만나자마자 화사하고 달콤한 머스캣 향기가 공기 중으로 쏴아 퍼집니다. 쪼르르 잔 위로 맑고 투명한 황금빛 수색이 일렁이고, 싱그러운 청포도 향과 풋풋한 들꽃 향도 더 진하게 피어오릅니다. 이 찬란한 봄의 감각을 마주하고 있자니, 반사적으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평생을 바쳐 가꾸었던 지베르니(Giverny)의 정원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빛을 머금고 수면 위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수련과 다채로운 꽃들이 뿜어내는 생동감. 다질링이 품은 화사하고 다채로운 향기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알록달록하게 빛나던 그 정원의 색채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향기로운 다질링과 찬란한 모네의 정원에 취해 달콤한 슈크림의 맛을 음미하다 보니, 며칠 전 연희동의 한 찻집에서 2년 만에 마주 앉았던 다우(茶友)들과의 찻자리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그날 우리의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3단 트레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알록달록한 샌드위치와 샛노란 디저트들, 그리고 잔마다 각양각색으로 찰랑이던 다섯 종류의 차들. 그 다채롭고 눈부신 풍경은 마치 모네의 정원을 그곳 한가운데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그 알록달록한 화사함 속에서, 우리는 10년이 훌쩍 넘는 묵직한 인연의 시간을 나누었지요.
우리들의 변화는 마치 모네가 평생에 걸쳐 그려낸 화풍의 궤적과도 같았습니다. 모네의 초기작이 맑고 투명한 빛의 찰나를 좇았던 것처럼, 처음 우리가 '차를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로 뭉쳤을 때 우리는 속이 다 비치는 맑은 유리 다구 같았습니다. 쨍하게 부딪히고 반짝이면서도 우리의 마음 한구석은 늘 분주했습니다. 찻잔을 기울이면서도 아이가 있는 다우들은 하원, 하교 시간에 쫓겨 초조하게 시계를 보다가,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허둥지둥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야 했던 분주한 젊은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은 우리에게서 조급함을 앗아가고 다정한 여유를 남겨 놓았습니다. 훌쩍 자란 아이들 덕분에 이제 우리의 찻자리에는 시계를 보지 않고도 차의 잔향을 끝까지 음미할 수 있는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생기발랄 이십 대였던 다우는 그사이 삶의 크고 작은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쳐 내며, 한층 깊고 단단한 눈빛을 가진 어른이 되어 담담히 그간의 이야기를 꺼냈지요.
거친 파도를 딛고 무사히 도달한 생존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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