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 국제 규범 변화가 지향하는 것, 이제는 문화자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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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을 둘러싼 논의에서 "문화자치"는 더 이상 부수적인 구호가 아닙니다. 갈수록 국제 규범은 문화를 단순한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문제로 재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문화정책의 방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권력이나 행정이 문화적인 것을 공급하고 시민이 소비하는 방식은 점점 설득력을 잃고 있습니다. 이제 문화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을 제공했는가만이 아니라, 누가 문화적 방향을 정하고 그 결정에 참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문화적 권리(문화권)에 대한 국제 규범은 이미 1948년 세계인권선언과 1966년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시기 문화권은 주로 문화생활에 참여하고 예술을 향유할 권리로 이해되었습니다. 문화는 인간다운 삶의 일부였고,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진전이었습니다. 문화가 단순한 취미나 사치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라는 점이 국제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계의 문화권은 대체로 접근과 향유의 권리로 설명되었고, 문화정책의 결정 과정에 시민이 어떤 지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다뤄지지 않았습니다. 21세기 이후 문화권의 의미는 한층 더 넓어졌습니다. 유네스코는 문화다양성을 인간 존엄과 결부된 문제로 보았고, 각 사회가 스스로 문화정책을 설계할 권리도 강조했습니다. 이어 문화권에 관한 국제 논의는 향유할 권리에 머물지 않고 형성에 참여할 권리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최근의 국제 규범과 논의인 2022년 및 2025년의 MONDIACULT 논의는 문화권을 단순한 접근권이 아니라 문화정책의 방향 설정과 거버넌스에 관여하는 권리와 연결해 해석하는 경향을 한층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MONDIACULT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정책회의의 명칭으로, 최근 논의에서는 문화를 발전의 부수 영역이 아니라 지속가능발전, 민주주의, 공동체 회복력과 직결되는 공적 의제로 다루면서 문화정책의 결정 구조와 참여 원리를 함께 재검토하는 흐름을 보여주었습니다.
문화정책의 수립과 집행, 평가에 시민이 관여할 권리가 명시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변화는 문화를 더 이상 행정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목록으로만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문화는 공동체의 정체성, 삶의 방식, 관계의 형식과 결부되는 영역이며, 따라서 문화권 역시 단순한 이용권이 아니라 형성과 결정의 권리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변화는 한국의 문화정책을 다시 보게 만듭니다. 시민이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시설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문화권이 충분히 보장된다고 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역의 문화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어떤 사업이 우선되어야 하는지, 어떤 문화공간이 유지되고 어떤 예산이 배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시민과 지역공동체가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화자치의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문화권과 문화자치를 구체적으로 제도화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전의 칼럼에도 썼지만, 한국 사회에는 20여 년 전인 참여정부 시절 문화계와 시민사회가 문화부를 추동하여 문화헌장을 만든 바 있습니다. 문화헌장은 헌법에 간략하게 담겼던 문화권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강조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제도화하는 근거를 만들려는 취지에서 제정되었습니다. 문화권을 단순한 상징적 언어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시민의 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제도적 기준으로 옮겨보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부들의 무관심 속에서 문화헌장은 사실상 사문화되었습니다. 문화권이 정책과 제도의 중심 언어가 되지 못한 채 다시 주변부의 가치로 밀려난 셈입니다. 이 대목은 지금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화권에 대한 국제 규범은 지난 20년 동안 훨씬 더 구체화하였고, 그 내용도 강화되었습니다. 문화는 단지 향유의 문제가 아니라 참여와 기여, 더 나아가 결정의 문제까지 포함하는 권리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제도는 여전히 이 흐름에서 비껴나 있습니다. 문화권은 헌법과 문화기본법 등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만, 그것이 시민의 실제 결정권과 연결되는 수준까지 제도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권리는 존재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절차와 구조는 없는 상태입니다. 심심치 않게 나오는 개헌 논의에서 문화권을 국제적 흐름에 견줄 수 있게 제도화하는 것과, 이를 통해 시민들의 문화자치를 실질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도 이 때문에 제기됩니다. 개헌이 모든 문제의 해답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화권을 단순한 국가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 시민의 실질적 권리로 분명히 자리매김하는 계기는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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