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노동하는 부잣집 도련님의 방황에서 러-우 전쟁이 보이는 까닭
시인 신동문을 기억한다. 그가 쓴 시 '내 勞動(노동)으로'를 또한 떠올린다. '내 노동으로 / 오늘도 살자고 /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하고 문을 여는 시는 '내 노동으로 / 오늘을 살자고 /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하고 끝을 맺는다. '야위고 흰 / 손가락'들과 '창백한 얼굴로 명동에 / 모이는 친구'들과 만나면서도, 진짜 삶으로부터 괴리된 스스로의 오늘을 한탄하고 경계하려는 마음이 이 빼어난 시구 가운데 가득 들어찼다.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를 떠올린다. 위대하단 말이 부족하지 않은 동시대의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완벽하다'고까지 격찬한 <안나 카레니나>를 생각한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써내는 와중에서 당대 러시아 사교계의 위선을 폭로한 이 소설에서 작가가 저 자신을 투영해 써낸 인물이 바로 콘스탄틴 레빈이다. 시골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인 이 청년이 시골, 또 농부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남다르다. 풍족한 삶 속에서 농부들과 저 자신을 완전히 괴리된 무엇으로 이해하는 귀족, 지주들의 태도를 그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콘스탄틴 레빈은 세르게이 이비노비치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그와 함께 시골에서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시골에 대한 형의 태도를 보노라면 거북하고 심지어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콘스탄틴 레빈에게는 시골이 삶의 장소, 즉 기쁨과 고통과 노동의 장소였다. 하지만 세르게이 이바노비치에게는 시골이 노동에서 벗어난 휴식의 공간이자 타락의 독소를 제거하는 데 유용한 해독제였다. (중략) 그에게는 민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레프 똘스또이, <안나 카레니나> 중에서
비슷한 작품이 많다. 땀 흘리는 진짜 노동, 무에서 유를 만들고 사람들의 실제 삶을 더 낫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문학과 영화들이 말이다. 그 반대편엔 삶과 세상을 더 낫게 하지 못하면서도 부와 권력, 명예를 독차지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만들어 놓은 부조리한 구조에 대한 인식이 또한 자리한다. 중산층 가정의 소년 홀든 콜필드(<호밀밭의 파수꾼>) 또한 그래서 방황하여 절벽 끝까지 나아갔던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혼란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신작 <엔조>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앞의 작품들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분, 위선과 스노비즘을 적대하며 땀 흘려 노동하고 부조리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을, 앞선 예술이 먼저 고심하고 구축했기 때문이겠다.
<엔조>는 어떤 영화인가. 누군가는 이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함께 언급한다. 아마도 청춘의 방황과 동성애로 연결되는 소재 때문일 테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어서, 두 영화 모두 방황하는 부유한 집 자제가 형뻘 사내에게 매력을 느끼고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엔조>를 그저 그렇게만 소비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명징한 상징을 (비록 그 쓰임에 공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읽어내는 것이 더 나은 이해에 가 닿는 길이기 때문이다.
엔조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건축 엔지니어 어머니와 역시 엘리트 아버지 사이에서 자란 둘째 아들이다. 형은 공부도 운동도 잘하는 잘생긴 우등생이다. 바닷가에 자리한 수영장 딸린 대저택에 사는 이들에겐 남부러울 게 별로 없는 듯하다. 이 완벽한 집에서 딱 하나 빠지는 게 있다면 둘째 엔조일 테다. 수업도 못 따라갈 정도로 이해가 늦고, 대단히 잘하는 것도, 하고픈 것도 없다. 그럭저럭 그리는 그림을 더 파서 예술학교에 진학하거나 제게 잘 맞는 대안학교에 가라는 건 무리한 제안일까. 부모는 그래도 엔조를 믿고 기다려 주려는데, 엔조는 아들로서도 낙제점이다. 도무지 그들의 기대를 따라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저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을 비롯해, 수많은 현대 부잣집 도련님들의 성장드라마가 흔히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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