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의 나'를 이 그림 앞에서 위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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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비가 여행자의 발목을 붙드는 날이 있다. 지난주 제주 여행 중에도 그랬다. 종일 비가 내려 예정했던 일정을 접고 손자와 함께 서귀포 삼매봉도서관에 들렀다가, 바로 옆에 있는 기당미술관을 알게 됐다(관련 기사 : "제주도에 열 밤 더 있고 싶다" 외친 손자, 이 여행의 비결은요).
그날은 마침 서귀포공립 기당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거장 변시지 화백 탄생 100주년 특별기획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황토빛 사유, 존재의 바람>이 막 시작된 첫날, 지난 23일이었다. 제주의 전통 초가를 닮은 나지막하고 둥근 지붕 아래로 들어서자, 서늘한 빗소리 너머로 생의 거대한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시는 화가의 일대기를 따라 유기적으로 흐른다. 제1부 <내 그림에는 나만 없었다>에는 일본 유학기와 서울 시절 작품을 통해 그가 진정한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 고뇌 하며 성장해 가는 과정을 조명한다. 화려한 서양화 기법으로 촉망 받던 그가 왜 모든 명성을 뒤로 하고 고향 제주로 돌아와야 했는지, 그 치열한 정체성의 탐색이 고스란히 묻어 나는 공간이다.
제2부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에서는 1975년 제주 정착 이후 완성된 대표작들을 통해 변시지만의 독창적 조형 언어와 '제주화' 화풍의 정수를 보여준다. 전시장 벽면을 채운 누런 황토빛과 거친 검은 필선은 처절하리 만치 고독했다. 모든 그림들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어디 쯤에서 맞물리는 듯 선과 색채가 곱다. 제주의 거센 바람과 바다, 초가집과 말이 빚어내는 풍경 속에서, 유난히 발길을 붙잡은 작품이 있었다. 거친 파도가 휘몰아치는 섬의 한구석, 홀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을 그린 그림 이었다.
그림의 제목이 <절망>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부터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서른이 조금 넘은 나이에 우울증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 홀로 웅크리고 있던 삼십 년 전의 내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 그토록 절망적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앞날은 그 어떤 것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의 경계마저 흐릿했다. 그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힘든 하루를 버텨내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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