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라 불린 법원 서기관... 여순사건 희생자 방기환의 마지막 행적

여순사건 당시 박찬길 차석검사와 함께 즉결처형된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방기환 서기관의 마지막 행적이 검찰 조사기록과 제적부, 동료들의 증언 등으로 새롭게 확인됐다. 지금까지는 희생 사실만 단편적으로 알려졌지만, 사건 직전 피신 과정과 체포, 처형 직전의 상황까지 일부 복원되면서 그의 억울한 죽음이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1949년 광주지방검찰청(이하 광주지검)은 박찬길 차석검사와 방기환 서기관 피살 사건에 대한 인지조사를 실시했다. 두 사람은 여순사건 당시 각각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 근무하다 경찰 토벌대에 의해 반군 협력자로 몰려 적법한 사법절차 없이 즉결처형됐다. 이 조사기록은 오랫동안 잊혀 있다가 2021년 발굴됐으며, 이 기록 판독을 거쳐 두 사람이 어떤 경위로 체포되고 처형됐는지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1949년 9월 13일 광주지방검찰청 기세훈 검사가 실시한 증인 신문에서 당시 순천지원 서기관 박공환(40세)은 동료 방기환 서기관에 대해 "직무에 충실하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직원"이라고 증언했다.
이 진술에 따르면 1948년 10월 20일 오전, 박공환은 숙직실을 나와 "간밤 여수에서 반란군과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방 서기관과 함께 산으로 올라갔고, 순천교(장대다리, 현 장대공원) 부근에서 들리는 총성을 들었다. 동료 김철은 "광주에서 지원군이 내려와 진압하고 있다"고 전했다.
법원 앞뜰에도 총탄이 떨어지고 시내에서는 적기가(혁명가요)가 울려 퍼졌다. 오후 2시 무렵 세 사람은 각자 집으로 몸을 피했다. 이날 방 서기관은 숙직 당번이었다. 반란군이 순천을 장악하였고 관공서 직원을 색출해 사살한다는 소문이 돌자 이들은 신분증을 찢어버린 채 은신했다.
박공환은 법원 부근 모자점에 있다가 반란군에게 적발돼 그에게서 "경찰 아니냐"는 추궁을 받았다. 하지만 "고흥에서 볼일 보러 왔다"고 둘러대 겨우 위기를 넘겼다.
방 서기관의 행적을 언급하고 있다. 오후 5시께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박공환 가족과 함께 별실에서 총성과 적기가를 들으며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23일 오전 진압군은 순천읍 주민들에게 순천북국민학교(현 순천대학교 위치)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운동장에서는 군과 경찰이 몸수색을 실시했고, 시민들은 교정에 모여 대기했다. 박공환은 그곳에서 방 서기관과 다른 법원 직원들을 다시 만났다. 서로 무사함을 반기던 것도 잠시였다.
그는 "오전 10시경 한 경찰이 갑자기 '반도다!'라고 외치며 방 서기관을 끌고 갔고, 경찰 2~3명이 달려들어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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