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부천군 구장(區長)들의 명과 암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주권을 일제에 빼앗기며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 여파는 사회 지도층 뿐만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삶 깊숙히 영향을 미쳤다.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무시되었고, 경제력 또한 일제에 속박되었다. 다량의 농지는 조선총독부 엄호 아래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인들에게 넘어갔으며, 우리 농민들은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각 지역에 큰 농장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이 생겨났으며,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쌀은 일본 본토로 보내졌다.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으며 경제적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시대에 저항하며 자주독립을 찾고자한 사람들은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식민노예로 전락한 우리 선조들은 교육 또한 제대로 받을 수도 없었다.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학교는 많이 보급한 반면 조선인들의 자녀를 위한 공립보통학교는 적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용할 수 있는 학생수도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학을 하거나 학원을 만들어 지역에서 교육에 힘쓴 사람들이 있었다. 부천에서는 심상학원을 만든 이성환과 보명학원을 만든 이강덕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개인의 재산을 내놓고 조선인 자녀들을 위해 교육에 힘썼다고 하면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 무조건 칭찬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성환과 이강덕은 지역 유지로서 교육활동에 힘썼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의 최말단인 구장으로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부천군에서 구장으로써 활동하며 교육에 힘썼던 이성환과 이강덕 삶의 명암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이성환(李聖煥)
이성환은 소사역(현 부천역) 앞에서 오류양조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 부천에서 '주조업계의 패왕;으로 불린 이성환은 1930년 초부터 구장을 하면서 오류리(현재 서울시 구로구 오류동)에서 교육사업을 추진하여 자택에서 아동 20여 명을 모아 야학을 시작하였다. 1939년에는 심상학원이라는 재단을 세워 5만원을 기부하여 심상소학교로 승격시켰다. 이외에도 여러 번의 운영비와 증축에도 기부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1937년 4월 21일에 오류학원에서 송덕비 제막식이 진행되었다.
1936년 8월 5일 동아일보에서는 이성환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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