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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밭을 가져본 뒤에야 알게 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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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밭을 가져본 뒤에야 알게 된 마음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비아트릭스 포터 여사의 <피터 래빗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언제나 지독할 정도로 피터 편이었다. 자타공인 피터 래빗의 오랜 팬인 내게 파란 재킷을 입고 엄마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몰래 맥그리거 씨의 채소밭으로 들어가는 이 조그만 토끼는 단순한 캐릭터 그 이상이었다.

그 작은 몸으로 상추와 콩, 래디시를 정신없이 먹어 치우다 들켜서 허둥지둥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 누가 그를 미워할 수 있을까? 피터 래빗이 오래도록 사랑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완벽한 아이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터는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가지 말라는 곳에 가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집으로 돌아온다. 파란 재킷도, 신발도, 용기도 잃어버린 작은 토끼. 그런데 바로 그 실패 때문에 피터는 사랑스럽다. 피터는 교훈을 위해 만들어진 착한 아이가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길을 잃고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어린 마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재밌는 일이다. 나이가 들고 내 손으로 직접 채소를 키우기 시작한 뒤, 다시 펼쳐 든 피터 래빗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피터는 여전히 귀엽고 나를 웃게 만든다. 채소밭 주인 맥그리거씨에게 들켜 도망치는 위기의 순간에는 여전히 가슴을 졸이며 '도망쳐!' 하고 속으로 외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은 피터뿐만 아니라, 맥그리거 씨의 밭 구석구석을 유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연한 상추 잎이 뜯기고, 프렌치 빈 꼬투리가 잘려 나가고, 흙 속에서 갓 영근 래디시가 누군가의 허기와 장난으로 쑥쑥 뽑히는 장면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순수한 토끼만을 응원하는 독자가 아니었다. 어느새 맥그리거씨의 밭을 함께 걱정하는 농부가 되어 있었다.

지금 내 밭에도 상추와 래디시가 자란다. 당근과 토마토, 가지와 고추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피터 래빗의 오랜 팬으로서 그 마법의 세계와 나를 이어줄 파슬리 역시 키운다. 동화 속에서 피터는 맥그리거씨의 정원에 잠입해 상추와 프렌치 빈, 래디시를 배가 터지도록 와작와작 먹어 치운다. 그러다 과식 탓에 속이 울렁거리자, 소화를 도와줄 파슬리를 찾아 밭 가장자리를 헤맨다. 이 장면이 어쩐지 너무 귀엽고 마음에 남았다.

동화는 때때로 아주 늦게, 우리가 다른 삶을 살아본 뒤에야 새로운 문장을 열어준다. 영국에 머물던 시절, 내가 비아트릭스 포터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인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를 유독 사랑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로 향하는 여정 중에도 일부러 하루를 머물 만큼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다.

호수와 돌담, 낮은 구릉과 양떼, 오래된 집들이 만드는 풍경은 영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당장이라도 피터 래빗이 뛰어 나올것 같은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풀과 비, 돌담과 침묵으로 이루어진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이런 풍경이었기에 그런 아름다운 동화가 태어날 수 있었음을 온몸으로 납득하게 되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처음 방문하는 지인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때, 책 속 삽화와 완전히 똑같은 <피터 래빗>의 언덕을 마주하고 터져 나오던 행복한 웃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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