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을 계속 맴돌던 소설, 단숨에 읽어 내려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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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제목만으로도 끊임없이 삶의 주변을 맴돈다. 서점 매대에서, 누군가의 SNS 피드에서, 혹은 지나치던 대화의 틈새에서 이름만 여러 번 나를 지나쳐 갔던 책이 있다. 그러다 얼마 전 도서관에 들렀을 때, 서가 한구석에 꽂힌 그 책이 드디어 나의 발목을 가로챘다. 마침 눈에 띈 것은 '큰글자책'이었다. 시야에 시원하게 들어오는 글자들을 따라 첫 장을 넘겼을 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묵직한 장편 소설을 늦은 밤까지 단 한 순간도 덮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될 줄은 말이다.
김금희 작가의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2024년 10월 출간)는 잔잔한 수표 아래로 거대한 조류가 치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품은 작품이다. 이야기는 주인공 영두의 현재와 과거, 낙원하숙을 지키는 안문자 할머니의 가슴에 담은 모진 세월, 그리고 지금의 시간을 씩씩하게 살아내는 어린 산아의 서사까지 종횡무진 교차하며 흘러간다. 소설의 바탕을 흐르는 서사가 탄탄하고 정교하여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이들의 삶을 추적하게 된다.
박제된 시간 앞에 서는 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떤 기억은 삶의 많은 부분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오랫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스며들어 아무리 씻어내도 빠져나가지 않는 얼룩 같은 것들이 있다.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사소한 과오 같은 것들 중 어떤 것은 나이가 든 후 "그땐 어렸으니까"라며 쉽게 털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죄책감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 역설적이게도 살아가는 동안 '더는 부끄러운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기억은 흐려질지언정 그 기억이 남긴 도덕적 부채감은 영혼의 구석에 고여 삶을 끊임없이 성찰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퇴색 되지 않은 채,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처럼 등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주인공 영두에게는 서울 유학 시절 리사와 겪었던 일이 바로 그러한 마음의 짐이었다. 오랜 시간 그 아픈 기억을 외면하고 기억의 심연에 박제해 두었으나, 인생은 그렇게 순순히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삶은 뜻하지 않은 순간에 과거의 문을 두드린다. 감추려 할수록 과거는 현재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소설은 그 박제된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어 마주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아물게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두에게는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건축 실무 작업이 바로 그 치유와 직면의 도구였다. 무너진 건축물의 뼈대를 맞추고 유리를 갈아 끼우는 일은, 곧 자신의 부서진 과거를 하나씩 복원해 나가는 정신적 의식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픔을 통과해 낸 자리에만 더 단단한 새 살이 차오를 수 있다는 것을 소설은 영두의 조용한 발걸음을 통해 보여준다.
건축물에 비유한 인간의 삶
이 소설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은 '건축물'이라는 공간의 서사를 인간의 내면 세계와 완벽하게 중첩 시킨다는 점이다. 허름한 낙원하숙의 오래된 대문 손잡이가 가진 정체, 그리고 한국 최초의 유리온실인 창경궁 대온실이 품고 있는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는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그 공간을 거쳐 간 인물들이 삶에서 불가피하게 입었던 상처들의 물리적 증거물이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공간의 기억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되고, 그 안에서 살아온 인간의 숨결을 증명하는 보루가 된다.
창경궁 대온실 보수 공사 과정과 일제강점기 시절 그 온실을 설계하고 만든 일본인 건축가 후쿠다 노보루의 이야기가 교차할 때, 소설의 몰입도는 더욱 높아진다. 보수 공사를 위해 땅을 파헤치던 중 발견된 의문의 뼈, 그리고 그것이 낙원하숙의 안문자 할머니가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온 비밀과 연결되어 있음을 예감하는 영두의 시선을 따라갈 때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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