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과 천재 사이의 줄타기, 탁구 천재의 기구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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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열린 세계탁구대회. '마티 마우저'는 승승장구하지만, 랭크에도 없던 일본 선수 '엔도'에게 결승에서 무참히 패한다. 설욕을 꿈꾸며 뉴욕으로 돌아왔지만, 미국에선 아직 생소한 탁구선수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당장 생계를 위해 삼촌의 신발가게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처지. 다가올 일본 오픈에 출전해야 하지만, 항공권도 구하기 힘든 형편에 온갖 궁리를 해가며 여비 마련에 혈안이 된다. 하지만 일은 점점 꼬이기만 하며 그를 벼랑으로 몰아간다.
비인기종목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의 설움
1952년 뉴욕,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은 잊혔지만, 한국전쟁과 냉전이 펼쳐지며 초깅대국 미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탁구는 아직 국내에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스포츠다. 중국과의 '핑퐁 외교'가 벌어지기까진 아직 20년은 남았다. 주인공은 하필 그런 미국에서 탁구로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그는 세계 챔피언도 가볍게 꺾는 대단한 실력자이지만, 정작 고국에선 신발 영업으로 풀칠하는 처지다. 야구와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와 농구의 나라에서 태어난 죄다.
당시 미국탁구협회는 마티의 표현대로라면 '중년 남자 2명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게' 전부라 선수 활동에 쓸모가 없었다. 해외 대회에 출전하려면 자비를 들여야 했다. 국제경기에서 현재 미국 스포츠 대표팀이 누리는 여건을 생각하면 천양지차다. 브리티시 오픈에서도 임원은 고급 호텔에 묵지만, 미국 1위인 마티는 초라한 공동숙소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때문에 항의하다 미운털만 박힌다.
그래도 우승하면 얻을 명성과 상금만 바라봤지만, 뜻밖의 강자가 출현했다. 심지어 전쟁은 끝났어도 여전히 적성국 인식이 머리에 박혔던 일본의 무명선수다. 명예도 실리도 뭐 하나 얻지 못한 채 쓸쓸히 귀국한 그에겐 구질구질한 현실, 거액의 청구서, 냉대와 설움만 가득할 따름이다. 게다가 어릴 적 소꿉친구 '레이첼'이 그와 불륜을 나누다 임신까지 해버렸다. 어떻게든 다가올 일본 오픈에서 설욕하고 탁구선수로 자리를 잡고 싶다. 욕망이 마티를 지배한다.
주인공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에게 굴욕을 안긴 엔도에 대한 설욕, 다가올 일본 오픈에서 우승해 인생 역전을 달성하는 것뿐이다. 팍팍한 현실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외아들만 바라보며 매달리는 엄마나 욕망을 풀던 애인은 그를 속박할 수 없다. 친구라 해봐야 돈줄이거나 함께 야바위 도박을 벌이는 동료뿐이다. 탁구만이 그의 관심사이자 지긋지긋한 현생에서 벗어날 '동아줄'이다. 23살 흙수저 유대인 청년이 일상에 만족할 수 없다면 품어봄직한 꿈이긴 하다.
윤리와 예의를 초월한 욕망의 질주
다가올 일본 오픈에 마티는 모든 걸 건다. 하지만 뉴욕에서 도쿄까지는 너무나 멀다. 항공권을 사기 위해 삼촌의 제화점에서 팔자에 없는 영업사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 틈만 나면 달아날 궁리만 하는 주인공인데 어째 언변이 좋아서인지 영업 실적이 훌륭하다. 또래 직원 '로이드'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한 매니저 지위를 친척 찬스라 해도 삼촌이 제안할 정도다. 착실히 소박하게 살고자 하면 더없이 좋은 기회지만, 정작 마티에겐 아무 의미가 없다.
오직 탁구대 앞에 설 때만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는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무대에 서는 것에 방해가 되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다. 멀리 해외 경기에 나갈 동안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는 모친이나 연인에게조차 무관심하다. 모든 인간관계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냐 이용가치가 있느냐 여부로만 판단한다. 자아도취로 보일 만큼 자신만만한 그는 평범한 주변인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기에 닥치는 대로 이용하고 속이길 거듭한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시합 때는 좀 밉상이긴 해도 탁월한 실력으로 경탄의 대상이던 그의 일상은 남루함을 넘어 '악인'의 전형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는다. 전도유망한 탁구 유망주, 스스로는 세계 최고의 선수라 자신하는데, 정작 고향에선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명의 설움이 사무친다. 세상이 나쁜 거라 믿으며 실력에 걸맞은 영광만을 쫓는다. 나는 이런 데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한탄은 그의 모든 사고를 지배한다. 하지만 주변에선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으로만 비칠 뿐.
작중 첫 대회에 참가하고자 런던행에 오를 때부터 그의 통념과 상식을 초월한 면모는 두드러진다. 자리를 비운 사이 삼촌이 퇴근하는 바람에 여비를 얻지 못한 마티는 총을 들이대고 동료를 협박해 항공권 비용을 가져간다. 엄연히 무장강도에 해당하는 범죄다.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달라며 건넨 경비도 횡령해 내기 도박에 탕진한다. 후원자에게 무리한 투자를 회유하거나 거짓말로 면담 기회를 잡는 건 그에겐 아무런 죄의식이 없는 행위다. 자신은 특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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