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도 쉽게 발길을 떼지 못했던 대구 근대화거리

나라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목숨을 걸었다. 고문과 투옥, 망명의 고통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이는 집과 논밭을 팔아 독립자금을 마련했다. 그들의 희생 끝에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강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기억은 희미해졌다. 일부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생활고 속에서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매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달리,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대구의 근대화에는 선교사들의 헌신도 깃들어 있다. 낯선 땅에 들어온 그들은 병원을 세워 환자를 돌보고, 학교를 열어 새로운 학문을 가르쳤다. 열악한 환경과 전염병 속에서도 의료와 교육 활동을 이어가며 대구가 근대도시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지난 15일, 대구간송미술관을 둘러본 뒤 대구 구도심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오래된 골목과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청라언덕과 대구 근대문화골목이다. 그들은 머나먼 이국에서 왜 대구를 찾았을까. 이곳에서 무엇을 했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역사의 현장, 청라언덕
19세기 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을 거쳐 부산항에 닿았다. 그러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직 철도가 놓이기 전이어서 다시 말을 타고 험한 산길을 사흘가량 넘어서야 대구에 이를 수 있었다. 언어도 문화도 전혀 다른 낯선 땅이었다.
당시 대구는 경상도를 아우르는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면 영남 전역으로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펼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99년 미국 북장로교는 대구에 선교기지를 세웠다. 청라언덕은 영남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선교사들은 먼저 집을 짓고 예배당을 세웠다. 이어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시작했고, 제중원을 설립해 서양의학을 전했다. 훗날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동산병원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발자취는 대구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다.
오늘 청라언덕에 남아 있는 붉은 벽돌 선교사 주택은 단순한 옛 건물이 아니다. 태평양을 건너 이름조차 생소했던 도시를 찾아와 평생을 바친 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 흔적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1899년 의료선교사 존슨이 작은 초가에서 약을 나누어 주고 환자를 돌보면서 제중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제중원은 훗날 동산기독병원과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했다. 언덕 위 붉은 벽돌집과 병원 터에는 낯선 땅에서 생명을 살리고 근대 의술을 전하려 했던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청라언덕에 들어서면 대구 근대 의료의 출발점인 제중원의 흔적을 만난다. 1899년 미국 의료선교사 우드브리지 O. 존슨이 세운 제중원은 대구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훗날 동산병원을 거쳐 오늘날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이어진다.
길을 따라가면 블레어와 스윗즈, 챔니스 선교사 주택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은 각각 교육·역사박물관과 선교박물관, 의료박물관으로 활용되며 대구 근대교육과 선교, 의료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100여 년의 세월을 견딘 붉은 벽돌 건물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새로운 문물을 전했던 선교사들의 삶과 헌신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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