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며 맥주 한 잔 마시고 읽는 책, 삶의 낙 잃은 남자가 택한 것

때로는 숫자 하나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작품을 이어주기도 한다. 35년. 한 사람이 한 분야에서 평생 노동한 세월이다. 나 또한 그랬다. 35년 교직을 마친 직후,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주인공 '한탸'를 만났다. 그리고 4년이 흐른 뒤, 대학로SH아트홀의 연극 무대에서 한탸(정동환 분)를 다시 만났다.
'한탸'의 35년 러브 스토리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35년간 지하실에서 책과 폐지를 처리하는 일을 해온 압축공 '한탸'의 회상과 몽상 그리고 기억에 대한 기록이다. 연극을 보기 전, 소설을 한 번 더 읽었다. 이 소설을 연극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해 냈을지 궁금했고, 공연을 기다리는 내내 설렜다.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폐지 꾸러미가 관객을 맞이했다. 지하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길목부터 객석까지 폐지가 나풀거렸다. 무대 장치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한탸가 음료를 마시는 테이블 하나, 선반까지 부러진 낡은 책장 하나가 무대 오른편에 자리했다. 왼쪽 구석에는 허름한 한탸의 침대가 놓여 있었고, 중앙 위에는 지상에서 지하로 폐지가 쏟아지는 통로가 있었다. 그 오른쪽 아래로 압축기가 마련되어 있었다.
한탸 머리 위로 폐지가 쏟아진다. 어두운 지하실 조명 아래 쏟아지는 폐지는 마치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같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한탸의 표정 때문이다. 폐지 속에서 찾아낸 책을 마주하는 한탸의 표정은 흡족하기 이를 데 없다. 폐지 속에서 책을 건져 들고 먼지를 툭툭 턴 뒤 훑어본 한탸는, 책에 가볍게 입맞춤하고 압축기에 넣는다.
압축한 꾸러미는 미리 보관해 둔 반 고흐의 <해바라기> <풀밭 위에서의 점심식사> <게르니카> 등 유럽 화가들의 그림으로 둘러싼다. 그러고는 시원하게 음료를 마신다. 원작에서 한탸가 마시는 맥주는 독서를 위한 나름의 신성한 의식이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서도 한탸는 행복하다. 그의 낡은 가방 안에는 폐지 속에서 찾아낸 보물 같은 책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 그 책을 읽을 생각에 발걸음도 가볍다. 비록 지하에서 폐지 더미와 일하는 늙은 압축공에 불과하지만, 한탸의 몸과 마음을 채워주는 책 속의 문장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삶은 조금도 비루하지 않다. 충만한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에게는 흉내 낼 수 없는 품위가 있다.
'녹색등이 켜지면 기계적으로 길을 건넌다. 행인이나 가로등과 부딪치는 일도 없이 걸어간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16쪽)
소설과 연극 속에서 한탸는 35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해 왔다. 생쥐가 들끓는 지하 작업장에서 지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폐지를 모아 꾸러미를 만들고 압축기에 넣었다. 근로를 재촉하는 작업 관리인의 모욕적인 언사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탸가 노동할 수 있는 원동력은 그의 '독서'였다. 폐지 속에서 찾아낸 철학자들의 저서나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삶의 위안을 찾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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