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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고전이 다시 묻는다…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객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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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주희 기자 = "자비도, 정의도 그대들의 것이고, 신마저 그대들의 것이라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탐욕스러운 악인의 대명사로 기억돼 온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 그의 한탄스런 독백은 법과 정의, 차별과 복수의 문제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묻는다.

지난 8일 막을 올린 '베니스의 상인'은 오경택 연출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원작 속 샤일록을 새롭게 조명한다. 익숙한 희극의 외피를 유지하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비극성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작품은 16세기 계약과 법이 지배하는 도시 베니스와 사랑과 낭만의 공간 벨몬트를 오가며 전개된다.

베니스에서는 상인 안토니오가 친구 바사니오를 위해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기한 내 돈을 갚지 못하면 살 1파운드를 내어준다는 조건이 걸린 계약은 거대한 갈등의 불씨가 된다.

벨몬트에서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신랑감을 기다리는 포셔와 바사니오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기 다른 구혼자들이 포셔를 얻기 위한 시험에 도전하는 과정 속에서 '빛나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유쾌하게 전한다.

그러나 작품은 희극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품의 각색도 맡은 오경택 연출은 악인으로 소비돼 온 샤일록을 통해 원작에 내재한 비극성을 풀어낸다.

극 초반부터 샤일록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모욕을 당한다. 안토니오를 비롯한 베니스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으며 멸시한다.

자신을 경멸하던 안토니오가 돈을 빌리려 하자 샤일록은 이를 그간 당한 수모를 되갚을 기회로 여긴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살 1파운드라는 잔혹한 계약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때마침 안토니오의 배가 모두 난파돼 돈을 갚을 수 없게 되면서 샤일록은 복수를 행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다. 하지만 일은 샤일록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법학박사로 위장한 포셔가 계약서를 빌미로 '피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내걸고, 상황은 단번에 뒤집힌다.

공연의 백미는 단연 이 법정 장면이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이는 포셔이지만, '베니스의 시민을 해하려한 이방인'으로 지목돼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지는 샤일록의 모습은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복수를 꿈꾸던 그가 목숨을 구걸하고, 신앙은 물론 존엄까지 잃는 모습은 자연스레 '법과 정의는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샤일록은 정말 악인일까. 아니면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한 또 다른 희생자일까. 공연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신 정의와 자비, 법과 인간성 사이에서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끝까지 붙든다.

인종과 종교, 계층 간 차별과 혐오, 다수의 정의와 소수의 권리. 400여 년 전 쓰인 희곡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은 이유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타인을 배제하고 낙인찍는 방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공연은 조용히 일깨운다.

무대의 중심에는 원로배우 박근형이 있다. 이번 공연에서 원캐스트로 샤일록을 연기한 그는 분노와 복수심, 상처와 절망을 오가는 복합적인 감정을 절제된 연기로 쌓아 올리며 인물에 깊이를 더한다. 악인이라는 하나의 얼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 샤일록을 끝내 관객 앞에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낸다.

최수영과 함께 포셔를 맡은 원진아도 탄탄한 연기를 선보인다.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하길 갈망하는 부유한 상속녀에서 지성과 담대함을 갖춘 여성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낸다.

국내 현역 최고령 배우 신구는 베니스의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공작으로 출연한다.

공연은 다음 달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감언론 뉴시스 juhee@newsi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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