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억짜리 '청자 베개' , 어마어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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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123년 음력 6월.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송나라 절강성에서 8척의 배를 타고 출발한 대규모 사신단이 고려에 도착했다. 1년 전 승하한 고려 제16대 왕 예종의 죽음을 조문하고, 14살 어린 나이에 등극한 예종의 맏아들이자 고려 제17대 왕 인종(仁宗)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사신단 일행이 고려의 관문인 벽란도에 들어서자 고려 군사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징과 북을 울리며 그들을 환영했다.
바다와 접해 있어 수심이 깊은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는 말 그대로 언제나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고려 최대의 항구였다. 송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 태국, 심지어 이슬람 왕국과 아라비아 상인들도 드나들며 고려와 교역했던 세계적 무역항이었다. 고려를 방문하는 외교 사절단 역시 배를 타고 와 벽란도에서 내렸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영문 명칭 '코리아(KOREA)'가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도 이들 때문이다.
외국 사절단을 접대하던 관사 '벽란정(碧瀾亭)'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다음 날 개경 도성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송나라 사신단의 입은 벌어졌고 눈은 휘둥그레졌다. 12세기 고려의 전성기를 누리던 개경은 그들이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송나라 수도 개봉(카이펑)에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왕이 머무르던 궁궐 '만월대(滿月臺)'는 규모가 크고 장엄했다. 도성 거리를 활보하는 귀족과 귀부인들의 복식은 매우 세련됐고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만의 고유하고 고급진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송나라 사신단 중 한 사람으로 글과 그림에 능했던 서긍((徐兢 1091~1153)은 한 달간 개경에 머무르며 고려의 정치·경제·문화·사회를 비롯하여 직접 경험하고 보고 들은 문물들을 상세하게 글과 그림으로 정리해서 송나라 황제 휘종에게 바쳤다.
이 책이 바로 우리가 고려의 문화 예술을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그로부터 4년 후 송나라와 금나라의 전쟁 중에 서긍이 그렸던 그림은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림에 대한 해설을 담은 글과 목차는 전 40권의 책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붕 위에 피는 푸른 꽃 '청자 모란당초문 기와'
송나라 사신단은 개경에서 대체 무얼 봤길래 눈이 휘둥그레졌을까.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 힌트가 있다. 사신단 일행이 개경에서 맨 처음 마주한 것은 바로 청자 기와로 장식한 호화 저택이었다. 서긍은 "고려인의 집은 꿩이 나는 듯이 화려하고 용마루를 붉고 푸른빛이 나는 청기와로 장식했다."라고 묘사했다.
서긍의 고려도경뿐만 아니다. 480여 년 고려 왕조의 공식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高麗史)>에도 고려청자를 건축부재로 사용한 기록이 있다. 1157년 의종 11년 기록을 보면 "대궐 동쪽에 이궁(離宮)을 완성했다. 또한 백성들의 집 50여 채를 허물어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편액을 쓰게 하였다. 정자 남쪽에 연못을 파서 관란정(觀瀾亭)을 세우고 그 북쪽에 '양이정(養貽亭)'을 지었는데 모두 지붕을 푸른 기와로 덮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2세기 고려청자문화가 정점을 이루던 시기에 비취색 청자기와로 지어진 정자는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의 극치를 이뤘다. 2009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은 개관 100주년을 맞아 기념 상징물로 박물관 본관 앞 연못(거울못) 한쪽에 고려시대 양이정을 본뜬 정자를 짓고 '청자정'이라 이름했다. 마치 거울처럼 비추는 연못과 어우러진 청자정은 박물관의 핫 플레이스 중 한 곳으로 관람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청자 기와는 1927년 조선총독부 시절 전남 강진 대구면 청자 도요지 근처에 사는 어느 소년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이후 1965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과장과 정양모 학예관은 대구면 사당리 일대 청자 가마터로 추정되는 가정집 한 곳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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