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을 '롤모델'이라던 시진핑…13년 뒤 주도권은 中으로
[서울=뉴시스]박영환 기자 = 우크라이나 전쟁과 서방 제재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커지면서 한때 대등했던 중러 관계가 중국 우위로 뚜렷하게 기울고 있다. 중국은 새 가스관의 가격 조건을 쥐고 중앙아시아 금융 질서를 주도하는 한편 북러 밀착은 견제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미 진행 중이던 중러 간 권력 이동을 가속했다고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기 위해 14번째로 중국을 방문했다. 최대 목표는 약 20년간 추진해 온 제2 천연가스관 ‘시베리아의 힘 2’ 건설에 중국의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보다 먼저 베이징에 도착한 러시아 대표단은 중국의 까다로운 조건과 마주했다. 중국 당국자들은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 측에 러시아 국내 판매가격과 같은 시세 이하 가격으로 가스를 공급해야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고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들이 전했다. 중국 측은 조건이 달라지기 전까지 이 문제를 다시 꺼내지 말라는 뜻도 전달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튿날 42건의 합의와 공동선언을 들고 베이징을 떠났지만 가스관 합의는 얻지 못했다.
중러 관계에 정통한 독일 기업인 요르그 부트케는 “시 주석은 성에서 손님을 맞는 황제처럼 푸틴을 맞은 뒤 돌려보냈다”고 평가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2013년 첫 만남 때와 크게 달라졌다. 당시 중국 국가주석에 취임한 시 주석은 첫 해외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하고 푸틴 대통령을 자신의 ‘롤모델’이라고 불렀다고 당시 대화 내용을 아는 소식통들이 전했다. 자원 의존형 경제를 이끌면서도 세계 강대국 지도자로 대접받는 푸틴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가스관 협상에서 중국은 서두를 이유가 적다. 중국의 수입 가스 소비는 2030년대 중반 정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데다 ‘시베리아의 힘 2’를 건설하려면 5~6년이 필요하다. 여러 국가에서 가스를 들여올 수 있는 중국이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높일 이유도 크지 않다.
기존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도 협상 개시 15년 만인 2014년 5월에야 합의됐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한 지 두 달 만으로, 서방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러시아는 중국에 할인된 가격을 수용해야 했다. 새 가스관은 과거 유럽으로 보냈던 가스를 중국에 공급하는 사업이다. 합의가 끝내 불발되면 중국이 유럽 시장을 대신해줄 것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구상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중러 전략적 협력이 깨질 조짐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러시아산 원유를 할인된 가격에 구매하고 러시아 방위산업에 필요한 부품과 금융 기반을 제공해 러시아의 전시 경제를 떠받쳐 왔다. 중국 외교부는 두 정상이 “높은 수준의 상호 신뢰와 깊은 우정”을 쌓았다고 밝혔고, 크렘린궁도 양국 관계는 평등에 기초한다며 러시아가 하위 동반자라는 해석을 부인했다.
그러나 경제 수치는 양국의 현격한 격차를 보여준다. 2013년 중국이 러시아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였지만 지금은 40%에 육박한다. 중국은 러시아 수출액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지만, 러시아가 중국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에도 미치지 못한다.
중국의 영향력은 금융으로도 확대됐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개발은행으로 추진되는 상하이협력기구(SCO) 개발은행에서 중국 위안화를 주요 통화로 사용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10년 넘게 반대했지만 금융 고립이 심화하자 입장을 바꾼 것이다. 은행이 출범하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옛 소련권 국가들이 중국에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다.
시 주석은 이러한 힘의 차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중러 관계 사진전을 둘러보는 두 정상의 사진에서는 대형 초상화 속 시 주석이 푸틴 대통령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중국 외교관들은 푸틴 대통령을 깎아내리려는 연출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WSJ은 시 주석이 공개석상에서는 푸틴을 존중하면서 비공개 협상에서는 양보를 끌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이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는 또 다른 무대는 북한이다. 중국은 북러 군사협력과 러시아의 기술 이전이 북한의 핵·잠수함 능력을 강화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한국과 일본을 미국에 더 밀착시켜 한미 관계의 틈을 벌리려는 중국의 전략을 흔들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24년 재선 뒤 베이징에 이어 곧바로 평양을 방문하려 했지만 중국의 요청을 받고 중간에 베트남을 방문했다. 중국·러시아·북한이 하나의 권위주의 진영으로 비치는 것을 피하려는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후 중러북 3국 정상회담을 비공개로 제안했지만 중국은 이를 거절했다고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들이 전했다.
시 주석은 대신 지난 6월 7년 만에 평양을 방문했다. 중국이 북한의 주요 후원자는 러시아가 아닌 중국이라는 점을 재확인하려는 행보였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장기 목표는 유지하되 북한과 관계를 확대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비핵화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중국은 푸틴 이후의 러시아를 이끌 관료와 엘리트들과도 관계를 넓히고 있다. 알렉산더 가부예프 카네기 러시아·유라시아센터 소장은 러시아가 앞으로 중국에 훨씬 더 의존하고 중국을 현대화의 모델로 바라보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공감언론 뉴시스 yunghp@newsi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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