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떠난 중년 레즈비언, 고향 마을 이장 되기 프로젝트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옥'은 서울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는 중년의 레즈비언이다. 하지만 장사도 신통하지 않고 동생처럼 챙기던 후배들과도 불화가 생긴다. 오랜 연인과도 괜히 거리를 두고 싶다. 가게를 정리한 만옥은 고향인 충청도 이반리로 돌아온다. 노모가 돌아가시며 그녀에게 남긴 시골집이 유일한 보금자리가 될 터이다. 하지만 고향엔 전남편이 이장으로 버티고 가족들도 오랜만에 돌아온 만옥을 환영하는 눈치는 없다.
그래도 고향에서 새로 출발하려 이웃들과 친목도 도모하며 아등바등하지만, 이장의 횡포는 번번이 만옥의 발목을 잡는다. 발끈한 그녀는 다가올 이장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고 선거운동을 개시한다. 원체 명랑하고 추진력도 좋아서 은근히 바람을 일으키는 전처에게 당황한 전남편은 급기야 감춰온 만옥의 비밀을 폭로하고 만다. 지지하던 이들도 더 상처를 겪기 전에 그만두자 하지만, 배수진을 친 만옥은 포기할 생각이 없다.
도시의 퀴어, 커뮤니티 내부의 세대차이 형상화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만옥이 그동안 어렵게 구축해온 삶의 기반은 허물어지는 중이다.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하며 원래 가족과 의절하다시피 떠난 그녀는 충청도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바를 운영한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만옥이 운영하는 가게는 단순한 술집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구심이자 회합 장소로 기능한다.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은 어린 후배들과 어울리며 후원자이자 '큰언니' 노릇에 늘 바쁘지만, 그래도 즐겁다. 하지만 시련이 닥친다.
어느새 가게에 드나들던 이들은 좀 더 서비스 좋고 세련된 경쟁 가게로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긴다. 커뮤니티 만남 공간으로서 위상이 흔들리게 된 것. 1년에 한 번 열리는 퀴어문화축제 뒤풀이 대관은 만옥의 가게가 갖는 위상 확인과 더불어 근근히 운영하는 바의 수익 측면에서도 버팀목 같은 이벤트다. 당연히 올해도 의리로 행사를 준비하던 만옥에게 행사 기획자들은 미안하지만, 이번엔 다른 가게와 제휴하겠다고 선을 긋는다. 배신감을 느끼는 만옥이다.
급기야 술김에 한바탕 속에 맺힌 설움을 쏟아내다 크게 분란을 일으킨 만옥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깨닫고 만다. 하늘이 무너진 기분, 더는 설 자리가 없다는 좌절감이 그녀를 휩싼다. 게다가 연인과의 관계도 예전보다 식은 것만 같다. 그야말로 '만옥의 세계'가 무너진 격이다. 서울살이에 오만 정 다 떨어진 그녀는 무작정 고향으로 향한다. 냉대와 찬밥 신세는 각오한 상태다. 모든 기반을 포기하고 새로 쌓은 퀴어로서 존재가치가 부정당한 기분은 메울 수 없다.
어찌 보면 만옥이 고향 이반리로 귀향하게 되는 배경이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다. 그동안 외부의 무지와 배격에 힘을 합쳐 '반지원정대'를 결성해야만 생존할 수 있던 조건 탓에 퀴어 당사자 개인 사이 이견과 갈등은 종종 영화 속에서 목격해도 커뮤니티 내부의 구도나 세대 간 소통 문제가 수면 위로 공개된 적은 드물기 때문이다. 좀 숨기고픈 단면까지 영화는 제법 구체적인 상황으로 묘사한다. 저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 바람 잘 날 없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보기 드문 농촌-중장년-퀴어 조합의 이색적 면모
적어도 한국 독립영화에서 사회 일각의 혐오와 배제와는 달리 '퀴어'가 당당히 일각을 차지하며 확장 일로다. 매년 전국 영화제에서 목격되는 해당 작품들은 나날이 다양한 경향으로 확산하며 경계를 넓히는 중이다. 도시생활자, 부모에게서 독립한 20·30대 위주에서 점차 청소년, 중장년 당사자를 다루거나, 다양한 삶의 단면을 포착하려 한다. 대상은 물론 공간과 배경도 변주를 거듭한다. 한국뿐 아니라 해외도 독립영화 흐름을 주도하는 면모는 별반 다르지 않다.
다양한 작업을 해마다 목격하지만, <이반리 장만옥>은 호불호 평가를 떠나 지금껏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독특한 결의 작품이다. 극영화 형식으로 해당 소재를 다룰 땐 대개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소외되고 차별을 겪는 퀴어 당사자의 수난사를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작은 위로의 메시지를 담아 긍정적 기운을 전하는 부류로 구분되는 편이다. 이 작품은 후자에 가깝지만, 조금 더 해당 경향을 깊숙하게 밀어붙인다. 그 결과는 여지껏 보기 드문 차원으로 향한다.
앞서 소개했듯 만옥은 스스로 갈 데가 없다고 여긴다. 이미 한 차례 모든 걸 내려놓고 쫓겨나듯 고향을 떠난 그다. 피해를 감수하고 가족과 연 끊다시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 했건만, 배신당한 기분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이대로 가라앉기엔 아직 살 날도 많이 남았고, 어쨌듯 낡은 시골집이나마 자가도 있다.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려 한다. 커뮤니티의 구심으로 활약하던 만옥에게 시골 마을 주민들과 친화력 구축은 늘 하던 일상의 연장일 뿐.
떨떠름한 표정 못 숨긴 일가친척과 대면하고 부모 제사 함께 치르며 이야기는 만옥의 이곳에서 과거를 소환한다. 번듯한 이장 마누라로 행세하며 살다가 갑자기 바람이 난 돈키호테 캐릭터로만 보이던 그녀가 겪었던 가부장제 치하의 막내딸이 겪었던 성장기, 가족 내에서 서열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전남편이 새로 꾸린 가족, 이장인 그가 휘두르는 관성적 미시권력, 지방의 소멸 위기와 일손 부족, 애매한 귀농/귀촌 청년들의 상황 등이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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