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레터'의 주인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점령당한 땅이라 해도, 예술마저 점령당할 순 없잖아. 캄캄한 밤 헤메일 때, 영혼을 구하는 한 줄 시가 이 시대의 가치가 아니다 누가 말할 수 있나?" - 뮤지컬 <팬레터> No.4 'Number 7'
"지금 문학이 무슨 의미, 나라가 이 지경인데 때려 치워라" 같은 삿된 말들이 횡행하던 시대였다. 일본 제국주의에 점령당한 경성은 말 그대로 "삭막한 도시"였다. 조선어를 억압하는 권력 앞에, 누군가는 펜을 꺾었고, 누군가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처럼 투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해도 사랑은 알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올 테니"라고 믿으며 "나비 한 마리에도 봄은 오듯이" 낭만과 예술의 언어를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카프(KAPF) 형님들"처럼 뜨겁고 거친 해방의 언어가 아닐지언정, 아니 오히려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이 가치 있다고 믿는 모더니스트였다.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바라는 이 도시의 모더니스트 숫자는 일곱이다. 뮤지컬 <팬레터>의 커튼콜, 일곱 명의 문인들은 함께 순수 예술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소설가 '김해진'이 자리한다.
"그때의 문인들은 지금으로 따지면 인기 많은 연예인, 잘 나가는 가수 같은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해요. 인기도 굉장히 많았고 고급스러우며 멋스러움을 아는 사람들이었죠. 어찌 됐건 생각을 앞서가서 글을 쓰는 모더니스트들이었으니까요.
사실 글을 쓴다는 게, 그게 아니면 먹고살기도 힘든 시대잖아요. 다들 가난해도 담배 피우고, 폐병에 걸리고, 당장 먹을 게 없어도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가 없냐' 하는 태도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인 거죠. 그게 그 사람들의 기본값이었을 것 같아요."
김해진을 연기한 배우 강필석은, 김해진이 '칠인회'에 합류한 이유를 '낭만'에서 찾았다. "칠인회 문인들과 해진은 좀 다른 결의 글을 쓴 사람들이지만, 각자 생각하는 낭만의 모양이 달랐을 뿐 해진 역시 자신만의 낭만을 생각하며 글을 썼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고, 다른 문인들과 추구하는 방향도 다른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이 글을 통해 이 도시에 봄을 틔우고 싶은 순수 문학인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이 작품에서 느낀 감정도 결국 '낭만'으로 수렴된다. 데뷔한 지 20년이 넘은 그는 '무대에 작품을 올리는 것 자체에 낭만이 있었던' 때를 추억하는 사람이다. "그들만의 낭만을 위해 펜을 들었던" 문인들처럼, 그 역시 여전히 그 '낭만'을 위해 무대에 오르고 있다. 뮤지컬 <팬레터>의 10주년 기념 공연이 한창인 지난 4월 말, 한 카페에서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나의 슬픔을 알아봐 준 단 하나의 빛
뮤지컬 <팬레터>를 끌고 가는 인물은 소설가 김해진과 문학도 정세훈 그리고 정세훈의 또 다른 자아인 '히카루'이다. 김해진의 열정적인 팬인 정세훈은 자신의 필명 '히카루'를 이용해 김해진에게 '팬레터'를 쓴다. 해진의 작품에서 본인이 읽어내린 정서를 글자로 풀어내고, 그 편지에 답장이 오는 게 세훈은 몹시도 좋았다.
이후 칠인회의 일을 돕기 위해 온 정세훈은, 가까이서 실제로 김해진을 볼 수 있게 된 것을 무척 기뻐한다. 그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세훈, 그러나 세훈은 해진이 히카루와의 편지에 생각 이상으로 몰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신이 히카루라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세훈은, 해진이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히카루를 향해 연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한다.
"처음에는 그 부분이 되게 어려웠어요. 해진이 세훈과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는, 세훈이 봤을 때 해진이 굉장히 선망의 대상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때는 기침도 좀 덜하고, 최대한 멋있게 보이려고 해요.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 '보지도 않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식의 말을 하잖아요. 그 연결이 처음에는 힘들었죠. 해진이 바보가 아닌데 (웃음), 자기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른다고 가기는 어렵더라고요.
세훈이 놀라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요?'라고 묻잖아요? 그래서 저는 '나 지금 이상한 말을 하고 있는 거 알아. 되게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것도 알아. 그런데 진짜 그래'라는 방향으로 풀었어요. 동시에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알지만, 지금 나한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라는 거죠.
전체 내용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