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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칼라의 살아있는 액젓 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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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칼라의 살아있는 액젓 장인들

바르셀로나 시푸드 엑스포 글로벌(Seafood Expo Global)에 참가하는 동안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왜 스페인 액젓 업체는 박람회장에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사실 왕신이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던 미국 아마존 플랫폼에서도 스페인 액젓업체의 존재감은 찾기 어려웠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엠푸리에스(Empúries) 유적지를 뒤로하고, 레스칼라(L'Escala)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2,5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작은 해안 도시는 여전히 스페인 제일의 멸치(Anchoa) 가공 산지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스페인 카탈루냐, 코스타 브라바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작은 항구도시 레스칼라(L'Escala). '멸치와 소금의 도시'라는 별칭처럼, 이곳에는 고대 엠푸리에스의 어류 염장 유적과 현대 멸치 공장이 나란히 공존한다. 수천 년의 시간이 한 도시 안에 층층이 쌓인 셈이다. 레스칼라 시내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걷다 보면, 지금도 봄과 여름철 연안에서 갓 잡은 멸치를 전통 방식 그대로 소금에 절이고 숙성시키는 장인들의 상점과 공방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고대의 어부들이 작은 목선을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 멸치를 잡아 오면,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항구에 닿자마자 즉시 소금 처리를 하던 그 치열한 삶의 방식이 형태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다. 2500년 전 지중해 연안의 어업과 발효 문화는 박물관에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의 거친 손과 소금기를 머금은 일상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문화적 자산으로 계승되고 있었다.

전통을 지키는 명가들: 솔레스와 안초베스 데 레스칼라, 랄란사

레스칼라 마을 곳곳에는 거대한 대량 생산 시스템에 맞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중해 발효의 맥을 잇는 명가들이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과 지중해 지역의 낮잠 문화인 시에스타(오후 2~5시에 휴식을 위해 일시 폐점)로 여러 업체가 문을 닫은 가운데, 그래도 반갑게 맞아준 몇 곳의 양해를 구해 방문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레스칼라(L'Escala) 엠푸리에스(Empúries)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안초베스 솔레스(Anchoas Solés)였다. 1888년에 설립되어 무려 5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하얀 건물의 이 회사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염장 공장 건물을 활용해 가문의 130주년을 기념하는 '솔레스 팩토리 뮤지엄'을 운영하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대대로 내려온 비밀스러운 패밀리 레시피와 오랜 드럼 숙성 공정을 눈앞에서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카탈루냐 와인과 함께 올리브 오일에 절인 최상급 발효 안초비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비릿한 향기와 깊은 감칠맛은 한국의 잘 삭은 액젓 진액을 처음 맛보았을 때의 감각과 닮아 있었다.

안초베스 솔레스 인근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이름을 만났다. 1940년에 문을 연 전통 멸치 가공업체, 안초베스 데 레스칼라(Anxoves de L'Escala S.A.)다. 지중해에서 건져 올린 멸치를 소금에 절여 오랜 시간 숙성한 뒤 손질해 내놓는 이 회사의 방식은 창업 이래 8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레스칼라를 대표하는 멸치 브랜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곳은 제품을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의 멸치 산업과 식문화를 알리는 일 또한 자신의 몫으로 여긴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깔끔하게 정돈된 매장과 전시 공간이었다. 멸치 제품은 물론 각종 절임 식품과 지역 특산품이 단정하게 진열돼 있었고, 공간 전체가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식품을 다루는 제조업체로서 위생과 품질 관리에 각별한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인상이 자연스럽게 전해졌다. 이 공간이 단순한 판매장과 달랐던 것은 벽을 따라 이어진 전시물들 때문이었다.

과거 레스칼라 어부들의 삶을 담은 흑백 사진과 옛 항구 풍경이 액자에 담긴 채 나란히 걸려 있었고, 멸치를 염장하고 숙성하는 데 쓰이던 목재 통과 전통 어업 도구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실제 멸치 어획에 사용했던 대형 그물은 공간 한쪽에 묵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현대적인 식품 제조 시설 안에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전 어부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적잖이 인상적이었다.

벽에 걸린 옛 항구 사진 속에는 멸치 어선들이 빼곡히 정박해 있었다. 당시 쓰이던 목재 통은 갓 잡은 멸치를 소금에 절여 저장하던 그릇이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레스칼라 멸치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공장 곳곳에 남겨진 이러한 유물들은 멸치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노동과 기억, 그리고 세대를 거쳐 전해진 저장과 숙성의 지혜가 응축된 문화유산이었다.

전통 멸치 산업을 보존하려는 의지와 현대적인 위생 관리, 그리고 지역 문화를 관광 자원으로 연결하는 시도가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모습은, 한국의 장독 발효 문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숙제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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