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의 원류] 제주인의 다양한 손재주, 섬의 기술문화를 만들다
제주는 오랫동안 '변방의 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문화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동아시아 해역을 잇던 해상교류의 거점이었으며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돌과 바람, 불과 흙을 다루며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궈왔다.
문헌과 유적, 생활문화와 구술, 자연환경과 생업의 흔적을 따라가며 제주가 지닌 독창성과 개방성을 살펴보고 문화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14일 오후 제주대학교박물관 수장고의 문이 열리자 서늘하고 건조한 공기가 먼저 밀려 나왔다. 선반 깊숙한 곳에서 기다란 나무판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표면은 먹이 밴 듯 검게 변해 있었고, 판면에는 손톱보다 작은 한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글자는 종이에 찍힐 때 바로 보이도록 모두 좌우가 뒤집혀 있었다.
책판 위에서 조심스럽게 한지를 걷어 올렸다. 희미했던 글자가 종이 위에서 선명한 검은색으로 살아났다. 세로로 이어진 문장 사이에서 '위연(魏延)'과 '양의(楊儀)' 등의 이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갈량 사후 위연과 양의가 대립하는 '삼국지연의' 후반부였다.
수백 년 전 제주목에서 책을 찍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 책판 25점 가운데 일부가 이번 취재를 통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가로 37㎝, 세로 21㎝가량의 책판을 뒤집자 전혀 다른 흔적이 나타났다. 판면 일부는 잘려 나갔고, 뒷면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에 밟힌 듯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책을 찍던 목판이 어느 순간 민가의 마루판이나 건축재로 바뀌었던 흔적이다.
◆유교 경전과 소설까지 찍어낸 제주
제주대학교박물관과 제주교육박물관에 남은 책판은 모두 27점으로 알려졌다. 이는 조선시대 제주목에서 보관하거나 책을 간행하는 데 사용했던 목판으로 추정된다. 제주대학교박물관 소장품에는 '맹자대전', '논어대전', '의례문해', '삼국연의' 등이 포함돼 있다.
유교 경전뿐 아니라 역사서와 병서, 의학서, 문집, 서예 교본과 소설까지 제주에서 인쇄하거나 보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주에서 간행된 것으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책은 고려 충렬왕 22년인 1296년, 제주 묘련사에서 판각한 '금광명경문구(金光明經文句)'다. 실물은 전하지 않지만 송광사와 장서각 자료를 통해 제주 간행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시대 간행본으로는 태종 18년인 1418년 제주목에서 찍은 '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이 가장 이른 사례로 꼽힌다. 제주 인쇄문화의 역사가 적어도 고려 후기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책판 하나를 만드는 일은 나무에 글자를 파는 단순 작업이 아니었다. 판재에 적합한 나무를 골라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 치목(治木), 나무를 삶고 말려 뒤틀림과 갈라짐을 막는 연판(鍊板), 글씨를 뒤집어 붙여 새기는 판각, 잘못된 글자를 바로잡는 교정과 보각을 차례로 거쳐야 했다.
2007년 '제주지방의 조선시대 출판문화에 관한 연구'로 전남대학교 석사학위를 받은 윤봉택 스님은 "당시 제주 출판문화의 기술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며 "목재의 선정과 가공, 판각, 먹과 종이 준비, 인쇄와 제본, 배포까지 하나의 지역 생산체계가 작동했다"고 말했다.
◆나무를 다룬 경험 축적이 제조기술의 바탕
제주에서 인쇄가 가능했던 물적 기반 가운데 하나는 목재였다. 제주에는 후박나무와 녹나무, 담팔수나무 등 크게 자라는 난대성 수종이 분포했다. 다만 현재 남은 책판의 나무 종류가 과학적으로 모두 확인된 것은 아니어서 특정 수종으로 제작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선박과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판재 자원이 제주 출판문화의 기반이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종이의 원료도 계획적으로 확보했다. 이원진 제주목사의 1653년 '탐라지'에는 제주목 서남쪽 해안과원에 닥나무 100그루와 옻나무 33그루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닥나무 껍질은 질긴 한지를 만드는 핵심 원료다. 관영 과원에서 나무의 종류와 수량까지 기록한 것은 종이 원료를 관리하며 길렀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제주의 책판은 여러 차례 큰 위기를 겪었다. 세종 17년인 1435년 제주목 관아 화재로 건물과 문적이 소실됐다. 숙종 3년인 1677년에도 제주목 책판고에 다시 큰불이 나 책판 대부분이 사라졌다. 경종 4년인 1724년 제주향교 화재 때도 일부 책판이 불탔다.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제주 사람들은 다시 나무를 구하고 각수를 모아 책판을 복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 전후로 이어지는 행정체제 변화 속에서 책판 관리는 급격히 무너졌다. 윤봉택 스님이 2006년 채록한 증언에 따르면 책판고를 관리하던 관원들은 책판을 마루판이나 건축재로 처분했고, 주민들이 이를 구입해 민가에 사용했다. 제주대박물관에서 소장한 책판은 1980년대 낡은 초가나 주택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것을 골동품상을 통해 구입한 것이다.
제주인의 목재 가공기술은 책판보다 앞서 선박 제작에서 확인된다. '고려사'에는 현종 3년인 1012년 탐라 사람들이 큰 배 두 척을 만들어 고려 조정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완성된 대형 선박을 제주에서 건조해 바다 건너 보냈다는 것은 목재 벌채와 건조, 선체 조립, 방수, 진수와 항해까지 수행할 기술과 조직이 존재했다는 뜻이다.
1268년 몽골이 지시한 기록에 따르면 탐라가 선박 건조 부역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별도로 배 100척을 만들게 하라는 내용이 있다. 1280년에는 탐라의 다루가치에게 휘하 철장들을 동원해 전함을 수리하도록 했다. 탐라는 선박용 목재의 공급지이자 배를 제작하고 철제 부속을 정비하는 해상 기술기지 역할을 한 셈이다.
큰 나무를 선박으로 만들고 작은 판재를 책판으로 다듬는 기술은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었다. 나무의 결을 파악하고 베고, 말리고, 켜고, 용도에 맞춰 형태를 만드는 축적된 목공 경험이 선박과 출판문화로 확장됐다.
◆약 2만년전, 돌의 성질을 읽다
제주인의 기술은 고려·조선시대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뿌리를 따라가면 약 2만년전 후기 구석기시대 서귀포 생수궤 유적에 닿는다.
생수궤 주변의 조면현무암은 풍화가 진행되면 수평 절리를 따라 얇은 판처럼 떨어지는 성질이 있다. 제주에 살던 구석기인들은 이 특성을 약점이 아닌 제작 조건으로 활용했다. 판석의 두꺼운 모서리에서 격지를 연속적으로 떼어냈고, 얇은 가장자리를 집중적으로 다듬어 찌르개를 만들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제주지역 석재에 적응한 독특한 제작법이라는 뜻에서 '생수궤 기법'으로 부른다.
신석기시대에는 도구의 종류가 더욱 다양하고 세분됐다. 신석기 전기 유적인 고산리에서는 뗀석기 전통과 초기 토기문화가 함께 확인된다. 석촉과 첨두기는 사냥에, 어망추는 어로에 사용됐다. 석부와 석도형 석기는 채집과 농경, 갈돌·갈판은 식료 가공, 석착(돌끌)과 돌톱·밀개·새기개는 목재와 석재를 다루는 작업에 활용됐다.
화산섬이라는 환경은 쓸 만한 돌이 부족한 조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돌마다 다른 단단함과 입자, 절리와 마모 특성을 구별하고 용도에 맞게 선택하는 기술을 낳았다.
◆탐라, 전문 토기 장인 등장
돌을 다룬 경험은 흙과 불을 다루는 기술로 확장됐다. 제주 토기문화는 신석기와 청동기·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했으며, 1세기 이후 기존 무문토기의 제작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다. 3세기 전후에는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외도동식토기가 등장했다. 가구마다 필요한 그릇을 개별적으로 만들던 단계에서 벗어나 취락 안의 전문 장인이 토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외도동식토기와 뒤를 이은 곽지리식토기에는 회전대를 이용한 기법이 적용됐다. 토기 바닥에서는 점토판을 틀에 고정해 돌렸던 회전축 흔적도 있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회전대를 이용하면 좌우대칭을 맞추고 일정한 크기의 그릇을 반복해 생산할 수 있다"며 "이는 탐라 전기 사회에 전문 토기 장인과 분업화된 수공업 생산집단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탐라 전기의 토기 제작 수준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유물이 대형토기다. 큰 토기를 만들려면 점토를 단순히 높게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흙 속 불순물과 수분을 조절하고, 자체 무게로 몸체가 내려앉지 않도록 두께와 곡률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대형토기는 흙의 성질과 건조 속도, 불의 온도를 경험적으로 이해한 전문 장인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대형 토기는 곡식과 물, 식료품이나 교역 물품을 저장하는 데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경남 사천 늑도 등 남해안 해상교역 거점에서도 제주에서 건너간 대형 토기 흔적도 보인다. 교류물품을 보관하는데 썼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반증한다.
◆꼼꼼한 손재주, 다양한 모자의 근원
제주 손기술의 전통은 근현대 관모(冠帽)공예에서도 이어졌다. 조선시대 제주에서는 갓의 차양인 양태, 윗부분인 총모자,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망건, 실내에서 쓰는 탕건이 널리 제작됐다.
관모 제작은 제주 여성들의 주요 생계수단이었다. 1895년 단발령 이후 갓 수요가 감소했지만 양태와 총모자, 탕건은 1960년대까지 제주에서 꾸준히 생산돼 육지로 팔려나갔다.
양태는 대나무를 약 0.1㎝ 굵기로 쪼개 만든 대오리 270~500여 가닥을 방사형으로 엮어 완성했다. 탕건은 말총 16가닥을 우물 정(井)자 형태로 엮고 수백 차례 감아 형태를 잡은 뒤, 찹쌀풀과 숯물로 삶고 먹칠해 단단하고 탄력 있게 만들었다.
현재는 홍선행(제주도 무형유산 고분양태 보유자), 김경희(국가무형유산 탕건장 전승교육사), 양금미씨(국가무형유산 갓일 양태 이수자) 등이 전통을 잇고 있다. 이들 3명은 지난해 제주관모제작소를 결성해 전통 양태와 탕건을 재현하고, 말총과 대나무 직조기법을 현대 모자와 장신구·생활공예품으로 확장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26일까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갤러리 벵디왓에서 '作: 행하다·일하다·창작하다' 전시를 열고 전통 관모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제주에서 만든 모자는 갓과 탕건에 그치지 않았다. 사냥꾼은 오소리나 소·개 가죽으로 만든 가죽감티를 썼고, 목자들은 소와 말의 털을 굳혀 만든 털벌립으로 비바람을 견뎠다. 또한 댕댕이덩굴을 엮은 정동벌립과 대나무로 만든 대패랭이를 머리에 얹었다. 밀대와 보릿대마저 패랭이의 재료가 됐다.
한 섬 안에서 가죽·털·덩굴·대나무·농작물 줄기까지 모자의 재료로 활용한 사례는 제주 기술문화의 다양성과 환경 적응력을 보여준다. 제주 모자의 특징은 단순히 종류가 많았다는 데 있지 않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의 성질을 파악하고, 사냥과 목축·농경·상품생산이라는 서로 다른 쓰임에 맞춰 제작법을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환경의 한계를 기술로 바꾼 섬
제주의 기술문화는 하나의 재료나 특정 시대에 머물지 않는다. 약 2만년전 사람들은 화산암의 갈라지는 방향을 읽어 석기를 만들었다. 3~6세기 탐라의 장인들은 흙과 불을 조절해 규격화된 토기와 높이 50㎝가 넘는 대형 용기를 제작했다. 고려시대에는 큰 배를 건조하고 전함을 수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나무를 평평하게 다듬어 수백 자의 글자를 거꾸로 새기고 책을 찍었다.
제주 여성들은 대나무와 말총을 머리카락보다 가늘게 나눠 갓과 탕건을 완성했다. 돌과 흙, 나무와 불, 대나무와 말총은 서로 다른 재료였지만 그것을 다루는 원리는 같았다. 재료의 성질을 관찰하고, 필요한 쓰임에 맞춰 제작법을 바꾸며, 손에서 손으로 경험을 전하는 일이었다.
제주는 외부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 변방의 섬이 아니었다. 바닷길을 통해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섬의 자연환경과 재료, 생활방식에 맞게 변형하고 다시 만들어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ijy788@newsi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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