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 끝내고 '지상전'으로 … "우리는 고이지 않고 흘러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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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인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청년'은 늘 시대의 감각을 선도하는 주체였습니다. 부산 영도에 위치한 심오한연구소 엄창환 연구원은 청년기본법 제정 운동을 이끌고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초대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청년 정책의 패러다임을 중앙 무대로 밀어 올린 '퍼스트 펭귄'입니다.
한 달의 1/3을 KTX 위에서 보내며 청와대 간담회에서 송곳 같은 발언으로 주목받았던 그가 돌연 활동의 그라운드를 부산 영도의 골목길로 옮겼습니다. 제도화의 정점에서 골목길의 일상으로 내려와 여전히 '연결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그의 우직한 활동 궤적과 미래 기획을 들어봤습니다. 5월 31일 부산 영도 심오한집에서 나눈 그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엄창환은 자신을 "감정이 잘 안 드러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자신의 선택을 극적인 결단이나 전환으로 포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내 생각이었는지 부모님 생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거나 "그 연결조차도 내가 의도한 건지 사실 모르겠다"는 식의 유보를 자주 덧붙였다.
청소년기부터 지금의 영도 활동까지를 되짚는 이 대화는, 그래서 한 사람의 신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단정보다, 신념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우연과 검증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 청소년기에는 어땠나요. 활동가들은 어릴 때 어떤 계기가 있는 경우가 많던데요.
"군대 갔다 오기 전까지는 사실 사회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어요. 자동차 회사에 들어가려던 것 말고는 아는 것도, 관심도 없었죠. 그저 신나게 놀았습니다. 시민사회와 연결된 경험도 없었고요. 굳이 연관을 찾자면 아버지가 노동조합 운동을 하셨다는 정도인데, 그것도 직접 들여다본 건 아니예요. 알게 모르게 영향이 있었을지는 모르겠네요."
엄창환은 아버지의 일화 하나를 기억으로 꺼냈다. 노동조합 지부장·위원장들이 서울에 모여 집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운전해 출발했는데, 집회를 앞두고 위원장·지부장들이 삭발을 한 상태였다.
부산을 빠져나가는 톨게이트에서 경찰은 차에 홀로 탄 삭발한 남성 운전자들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짐을 싸게 했고, 초등학생이던 그는 어머니·동생과 함께 차를 타고 서울 큰집으로 올라가 일주일 동안 학교를 가지 않고 지냈다. 다행히 그에겐 즐거운 기억이다.
기계공학도가 마주한 세상의 틈새, 봉사활동이 바꾼 궤적
전공은 기계공학이었다. 그는 공작기계를 다루고 싶어 했다. 공학자·과학자를 동경했고 이과 계열로 진학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방향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된 것은 전공 수업이 아닌, 군 전역 후 우연히 시작한 한 번의 봉사활동에서였다.
- 봉사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대학 1학년 때 '유스호스텔'이라는 여행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입단 원서가 300여 부 들어올 정도로 '노는' 동아리였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배낭을 사고 그거 메고 여행만 다녔죠. 그러다 2005년에 입대해 2007년에 전역했는데, 복학해 보니 동아리들이 대부분 침체돼 있더라고요. 놀긴 놀아야겠는데(웃음), 그때 눈치를 덜 보고 놀 수 있는 방법으로 찾은 게 봉사활동이었어요."
그가 처음 한 봉사는 KT&G의 '천사메신저'라는 인터뷰 봉사였다. KT&G가 각 지역 복지관과 연계해 환자를 후원하는 사업이 있었고, 그 수혜자를 인터뷰해 기관지에 싣는 일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글도 썼고 DSLR 카메라도 있어서 해볼만 하겠다 싶었다. 마침 집 근처 복지관에 수혜자가 있어 신청했다.
그러나 막상 약속한 날, 인터뷰는 성사되지 못했다. 인터뷰 대상자는 수술 중 다른 질병이 발견돼, 치료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그저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터뷰 대상자와, 눈물 밖에 흘릴 수 없던 그의 가족.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엄창환이 마주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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