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처형 소식 듣고 눈물 삼킨 형, 인민위원장 되다

<남산 소나무에 묶여 총살... 그는 왜 그곳에 있었나(https://omn.kr/2j7x7)>에서 이어집니다.
면 소재지 마을인 용산리 주민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은 듯했다. 지난 5월 1일 엄정공립보통학교에서 이름이 바뀐 엄정국민학교는 마치 시골 장날 같았다.
국민학교에는 용산리와 접해 있는 미내리 주민들과 외지와의 물물교역이 활발한 목계리 주민들도 대부분 참석했다. 신만리, 괴동리와 심지어 엄정면 동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추평리, 유봉리, 가춘리에서도 일부 주민들이 발걸음을 했다.
만장일치로 엄정면 인민위원장에 선출돼
1915년 용산리 공립보통학교(엄정초등학교의 전신)가 개교한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것은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선출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충주에 진주한 인민군은 1950년 8월 14일 충주에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바로 다음 날인 8월 15일에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선출하게 되는데 주민들의 직선이 아닌 11개 리 대표자 93명의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하게 되었다.
임시의장을 맡은 김복룡이 인민위원장 추천을 받자 "김복룡 동무를 추천합니다"라는 동의와 재청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김복룡이 참석자 전원의 만장일치로 충주군 엄정면 인민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해방일보는 이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리하여 충주군 엄정면에서는 면 인민위원 선거를 성공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이날 오후 1시부터 용산리 엄정인민학교 강당에서 11개 리 대표 93명이 출석한 가운데 엄정면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며 고 김삼룡 선생의 형님이신 김복룡 동무의 사회로 역사적인 이날 회의는 시작되었다. ~
상무위원 발표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복룡 씨, 부위원장에 장수명 씨, 서기장에 박영우 씨들이 선출되어 우렁찬 박수와 더불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삼창을 외쳤다(<해방일보> 1950.9.1).
김복룡 인민위원장을 포함해 15명의 인민위원을 선출한 이날 행사는 오후 5시부터 8.15 해방 (5주년)기념 경축 및 면 인민위원회 지지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는 오후 11시에 폐회되었다. 그러나 군중들은 헤어질 생각도 없이 밤늦도록 교정에서 농악대를 중심으로 무등 춤, 승무 등을 북, 징, 장구, 새납 등의 반주에 맞추어 뜻깊은 이날을 마음껏 경축하였다.
인민군이 충주 엄정면에 진주한 날 용산리 국밥집은 인민군과 구경꾼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인민군이 김삼룡 가족에게 "김삼룡 동지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합네다"라며 조의를 표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아들 삼룡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전운계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용산리 주민들도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인민군 간부가 김삼룡의 둘째 형 김복룡을 별도로 만났다.
"김삼룡 동지의 유훈을 계승하는 것은 조국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입네다. 동무가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맡아주시오."
김복룡은 동생의 죽음에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실의에 빠진 어머니와 가족들을 건사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한 개인적인 일보다 북한군이 점령하던 인공시절에 인민위원장이라는 중차대한 직책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다. 김복룡은 결국 김삼룡의 형이라는 이유로 엄정면 인민위원장을 맡게 된다.
항일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청년
김복룡은 용산리 공립보통학교 제5회 졸업생이다. 그가 입학한 1910년대는 보통학교 입학률이 1.7% 수준이었다. 100명 중 2명 미만이 입학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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