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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돈암서원 원정비가 품은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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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돈암서원 원정비가 품은 이름들

국도 1호선 논산에서 대전방향으로 십분여 가다보면 연산면 임리에 세계문화유산 돈암서원이 대로변 옆에 자리하고 있다. 입덕문을 들어서 양성당 앞에 서면 나지막한 비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백대리석 비신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얹고, 연꽃무늬를 새긴 네모난 받침돌이 그 몸을 받치고 있다.

비신 첫머리에는 굵은 글씨로 '連山縣遯巖書院碑記(연산현돈암서원비기)'가 새겨져 있다. 오늘날 문화재 명칭으로는 돈암서원 원정비(院庭碑). 현종 10년인 1669년에 세워졌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하면 대개 건물부터 떠올린다. 돈암서원 역시 보물로 지정된 강당인 '응도당'의 독특한 건축 구조가 먼저 소개되곤 한다. 그러나 건물은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 무대일 뿐이다. 돈암서원의 진짜 이야기는 오히려 이 작은 비석에서 시작된다.

비석은 건물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을 말한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얹어보면 한여름에도 대리석 특유의 시원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진다. 300년 넘게 비바람을 맞아온 돌치고는 놀라울 만큼 글자의 결이 또렷하게 살아 있다.

비문의 첫 문장은 "沙溪文元公金先生以崇禎辛未八月(사계 문원공 김선생이 숭정 신미년 8월에)"로 시작해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날짜를 적었고, 비석 뒷면 맨 끝에는 "己酉八月(기유팔월)"이라는 간지가 새겨져 있다. 숭정 신미년은 1631년, 기유년은 1669년. 스승이 세상을 떠난지 정확히 38년 만인 1669년 8월, 문하생들이 이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린 것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놓인 관계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예학자 김장생이라는 인물이, 그리고 그를 그리워한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가 조금씩 드러난다.

비문이 그려낸 아버지와 아들

비문에는 김장생과 아들 김집을 나란히 평가하는 문장이 나온다. "이룬 덕은 각기 다르나, 배움으로 삼고 가르침으로 삼는 바는 하나였다(成德各異而所以爲學爲敎者一也)."

성격과 기질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달랐지만, 학문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하나로 통했다는 뜻이다. 부자가 함께 벼슬보다 낙향과 강학을 택했다는 사실도 비문은 짚어 전한다.

김장생(1548~1631)은 본래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익힌 인재였지만,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지나며 관직보다 고향에서의 강학을 택했다. 예란 격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땅한 자리를 정하는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확신이었고, 그 확신을 물려받은 이가 아들 김집(1574~1656), 호는 신독재다. 비문에 부자를 "덕은 달라도 뜻은 하나"라 적었듯, 김장생이 예학이라는 큰 틀을 세웠다면 김집은 그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물려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김집의 문하에서 배출된 두 제자가 바로 이 비석에 이름을 남긴 송시열과 송준길이다. 스승의 아버지, 즉 김장생을 기리는 비석에 그 손제자뻘 되는 이들이 붓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학맥이 얼마나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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