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라 불린 남자, 대통령 경호처의 토대를 깔다
박상범의 경호실장 취임은 군사정권의 잿더미 위에서 되살아난 불사조와도 같은 사건으로, 한국 대통령 경호제도가 '충성의 문민화'로 전환되는 역사적 분기점을 상징한다. 1993년 2월 25일,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박상범에게 수여한 경호실장 임명장은 단순한 인사조치를 넘어선 정치적 선언이었다.
이전 정권에서 이어지던 경직된 의전과 권위적 분위기 대신, 비교적 절제되고 유연한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임명식은 '문민정부'의 출범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그 이면에는 단순한 형식 변화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는 권력의 정당성을 군사적 위계와 개인적 충성에 의존해 온 과거 체제를 넘어, 헌법 질서와 시민적 가치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 운영 원리를 천명하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인사의 성격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박상범은 해병대 예비역 대위 출신으로, 1970년 두 번째 준공개채용을 통해 선발된 전문 경호요원이었다. 이는 군 내부 인맥이나 정치적 연줄이 아닌 제도적 절차를 통해 경호 분야에 입문한 사례로, 이전 경호실장들의 경로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역대 경호실장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했거나 하나회 등 군 권력 핵심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성장한 인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배경은 경호 조직을 '대통령 개인에 대한 군사적 충성 집단'으로 만들 필요성에 있었다. 박상범의 임명은 과거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사건으로, 경호 조직을 전문성과 제도에 기반한 공적 조직으로 재편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인사였다.
더욱이 그의 개인사는 이 같은 제도적 전환에 상징적 깊이를 더한다. 1979년 10·26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발사한 총탄 네 발을 맞고도 생존한 경험은 그에게 '불사조'라는 별칭을 남겼다. 죽음의 문턱을 세 차례 넘나든 그의 생존 서사는 단순한 개인적 극복담을 넘어,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은 국가 시스템의 변화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군사정권 하에서 경호는 권력 유지의 도구였고, 충성은 특정 개인을 향한 절대적 복종의 형태로 요구되었다. 박상범의 등장은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충성의 대상을 개인이 아닌 헌법과 제도로 재정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취임은 결국 한 인물의 성공 서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권력 구조가 '군사적 충성'에서 '문민적 충성'으로 이동하는 전환기의 압축된 표상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근무하던 경호관 중 유일한 생존자
1979년 10월 26일,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늦은 밤의 궁정동 청와대 안가. 공기 중에는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는 순간, 경호 체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경호관들은 사건의 중심에 집결해 있지 못했다. 해당 공간이 중앙정보부 관할 안가였던 탓에, 이들은 외곽 경계 임무를 수행하거나 주방과 휴게실 등지에 흩어져 있었다. 총성과 동시에 발생한 정전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고, 경호관들에게는 총기를 꺼내 대응 사격을 하기 위한 극히 짧은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약 0.725초로 계산되는 대응 반응 시간은 그날 밤 철저히 봉쇄되었다.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박상범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발사한 총탄 네 발을 맞고 관통상을 입은 채 뒤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그는 피웅덩이 속에 방치된 채 약 10시간을 버텨야 했고, 이후 기적적으로 구조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는 치밀한 대응의 결과라기보다 우연과 공백이 겹쳐 만들어낸 기적에 가까웠다. 당시 현장에서 근무하던 경호관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였다. 현장의 다른 경호관들은 확인 사살로 목숨을 잃었으나, 그만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추가 사격을 피했다. 그 우연과 공백은 훗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는 10·26 사건이 지닌 미해결의 단면이자 동시에 박상범의 생존을 더욱 상징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국군수도통합병원 병실에서 의식을 되찾은 박상범은 곧바로 깊은 자책에 사로잡혔다.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했다"는 회한, 영부인에 이어 대통령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짐이 되는, 이른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 그의 내면을 파고들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생존담에 그치지 않는다. 10·26은 군사정권 하에서 구축된 '개인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 체계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 구조적 붕괴의 순간이었다. 박상범은 이 극한의 경험을 단순한 상흔으로 남기지 않고, 훗날 '불사조'라는 상징으로 승화시키며 충성의 대상을 개인이 아닌 헌법과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를 체현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미 경호실 내부에서 박상범의 경력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공개채용 기수로 동기 20여 명과 함께 경호 공무원으로 임용된 이후,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현장에 있었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당시에는 권총을 뽑아 단상을 지키며 긴박한 상황에 대응했고, 1983년 아웅산 묘역 폭파 테러 때는 전두환 대통령 차량의 앞좌석에 탑승할 예정이었으나 일정 지연으로 화를 면했다. 여기에 1979년 10·26 사건에서 총탄을 맞고도 생존한 경험까지 더해지며, 그는 세 차례의 사선을 넘나든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이력은 단순한 경력의 축적을 넘어, 경호실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경험은 박상범에게 충성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인식하게 했다. 충성은 더 이상 총알을 몸으로 막아내는 개인적 용맹에 머무르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도 작동하는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권력을 보호하는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역량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에 이르기까지 다섯 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하며 그는 권력의 생성과 붕괴는 물론 체제의 변화를 모두 목격한 산증인이었다. 김영삼이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과 인식을 체화한 '불사조'였으며, 그의 경호실장 취임은 '새로운 정부'가 내세운 개혁 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인사조치였다.
김영삼의 파격적인 선택
사실 박상범의 발탁보다 더 주목할 지점은 그를 선택한 김영삼의 판단이었다. 이전까지 경호실장 8명은 모두 대통령 최측근이거나 군사정권이 임명한 현역 장성 출신으로, 경호 조직은 군사 권력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전문 경호관 출신을 경호실 창설 이후 최초의 내부 인사 수장으로 임명한 것은 조직의 성격 자체를 재정의하는 결정이었다. 특히 대선 정국에서 다수의 군 장성 출신 인사들이 논공행상을 기대하던 상황을 고려하면, 박상범의 발탁은 기존 권력 네트워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파격적 선택이었다. 이는 정실이 아닌 전문성과 제도적 정당성을 기준으로 경호 조직을 재편하겠다는 의지에 머물지 않았다. 경호실이라는 '성역'에 문민 통제를 본격적으로 관철시키겠다는 정치적 선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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