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서 푹 쉬고 싶어" 남편의 한마디에 떠난 곳
"칙칙폭폭, 칙칙폭폭."
청춘 남녀가 땅거미가 질 때쯤 비둘기호에 올라탔다. 짐 보따리를 들고 타는 아주머니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다정한 연인들까지 기차는 만원이었다. 음료 카트를 미는 승무원을 피해 몸을 비트는 사람들로 차내는 붐볐다.
꼬리 칸으로 이동한 두 청춘은 뒤로 밀려나는 어둠에 손을 흔들고 바람을 친구처럼 맞아 주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해방감에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사내 연애를 하는 두 사람에게 낯선 도시로의 여행은 설렘과 자유로 충만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도착한 곳은 문경. 흙먼지 폴폴 날리며 덜커덩 거리는 시골버스를 타고 들어간 곳은 '동로'라는 산골 마을이었다. 빨갛게 익은 사과나무를 보며 감탄하는 여자의 볼도 발갛게 익어갔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잡초가 허리춤까지 무성하게 자란 산길이었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헤치며 겨우 도착한 산소 앞에 늘 든든해 보였던 남자의 어깨가 그날따라 작고 쓸쓸해 보였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자랐을 남자의 숨겨진 아픔이 산소 앞 고백을 통해 내 가슴으로 묵직하게 들어왔다.
"아버지, 제 여자 친구입니다. 소개하고 싶어서 같이 왔습니다."
그 청춘 남녀는 결혼 37주년을 함께 보낸 동지 같은 부부가 되었다. 남편은 십수 년간 돈을 벌어 빚을 탕감하느라 밤낮으로 일에만 파묻혀 지냈다. 여행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 덕분에 우리 가정은 안정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남편의 비장한 한마디
기다리던 휴무일이나 온 가족이 모이는 명절조차 남편에겐 온전한 휴식이 되지 못했다. 동료의 차가 고장 났다는 연락에, 혹은 급한 비상 상황이 터졌다는 전화에 언제든 불려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긴장 속에서 십여 년을 넘게 보냈으니 가끔 탈진해 쓰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남편이 짊어진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늘 한계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었다. 지난 5월 말, 남편이 뭔가 다짐한 듯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 이렇게 평생 일만 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 어디 가서 좀 푹 쉬고 오고 싶어."
회사와 팀원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남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를 통으로 쉬는 날도 잘 없는 편이었는데 이튿날 오전까지 쉰다는 것이다. 마치 유행가 제목의 "일과 이분의 일"처럼 우리에게도 하루와 반나절의 시간이 생겼다. 찜질방에서 푹 쉬고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문경새재에 다녀오면 좋겠어."
"그럼 1박도 가능해? 숙소 알아볼까?"
지난해에 친구들과 문경새재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시간이 되면 남편도 같이 꼭 왔으면 하는 곳이었다. 숙소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듬어 예약을 서둘렀다. 주말이면 금세 마감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다행히 평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문경은 우리 부부에겐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결혼 전에는 단둘이 애틋하게 찾았던 그곳을 결혼 후 새댁이 되어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1년에 두세 번씩 꼭 찾게 되었다. 시아버지의 고향인 그곳에 조상님 산소가 다 계시기 때문이다. 벌초와 시사를 드릴 때도 서울에 사시는 큰어머니와 여러 친척 어른들이 참석하셨다. 대부분의 행사 진행을 큰어머니와 시어머니께서 주관하셨기에 나는 새댁일 때부터 매번 참석하였다.
남편은 아버지가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어머니께서 떠나신 후 십수 년간 회사 일로 마음의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먼저 제안했다는 것은 마음이 지쳐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흔쾌히 숙소를 알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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