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니'로 신원 확인된 독립운동가, 그 아들의 비극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 7월의 프랑스 파리는 지금처럼 무덥지는 않았지만 다소 불안정한 날씨를 보였다. 당시의 주프랑스미국공사이자 1801~1809년의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이 현지 날씨를 기록한 내용을 디지털화한 '제퍼슨: 날씨 및 기후 기록' 사이트에 따르면, 그해 7월의 파리는 더우면서도 구름이 많고 비가 자주 왔다. 혁명의 절정인 14일에는 16도에서 22도 사이의 온도를 보이는 가운데 흐리고 비가 왔다.
프랑스대혁명은 현대 세계에서 빛의 역할을 한다. 어두운 봉건 왕정을 떠나보내고 대중의 존엄과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를 불러들이는 빛의 이미지를 띤다. 그러나 이 빛은 초기에는 불안정했다. 구름이 끼고 비가 자주 내리는 반혁명·반동의 역사가 뒤를 이었기 때문이다.
바스티유감옥이 습격되고 왕정이 폐지된 뒤인 1793년에는 왕당파와 가톨릭의 반란이 있었고, 이듬해에는 '테르미도르의 반동'이 일어나 혁명 이념이 후퇴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1799년에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키더니 1804년에는 스스로 황관을 머리에 썼다.
프랑스혁명만큼은 아니지만, 한국의 4월혁명도 맑았다 흐렸다 하는 불안전한 기상 상태를 보였다. 이승만이 하야성명(1960.4.26.)을 발표한 뒤 허정 과도정부는 '선 총선, 후 개헌' 아닌 '선 개헌, 후 총선'을 관철시킴으로써 자유당 의원들이 개헌을 해놓고 물러날 수 있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6월 15일 개헌 때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처벌 조항이 헌법에 들어가지 못했다.
8월 23일 출범한 장면 내각도 시대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을 통해 정권을 수호하는 데에 더 치중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도 시위가 많았다. 당시의 대표적 학생운동가였던 이기택(1938~2016) 전 민주당 총재는 <우행, 내 길을 걷다>에서 "9개월 밖에 안 되는 제2공화국 기간 동안 거리시위가 2천 건에 연인원 1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회고했다.
이런 혼란상이 이어지다가 1961년에 5·16 쿠데타가 벌어졌다. 이승만이 순차적으로 걸었던 독재의 길을 이때부터는 박정희가 단계적으로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가 극도의 혼란기였음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가치관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도되는 현상이었다. 이 시절을 살았던 김영욱(1923~2005)의 경험은 가치관이 순식간에 뒤집히곤 했던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좌익으로 몰아 국민보도연맹에 편입
지금의 경남 김해시 진영읍 출신인 김영욱의 아버지는 1900년생인 독립운동가 김정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3권 김정태 편은 1919년 3·1운동 당시의 진영장터 시위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3월 31일 오후 1시 그는 장터 근방의 흙다리에다 10척이나 되는 장대에 매어 단 대형 태극기를 세워두고, 시장에 모인 2천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나누어주고,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고 서술한다. 이로 인해 그는 징역 1년 6월형을 받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했듯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좌익으로 몰아 국민보도연맹에 편입시킨 뒤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그 상당수를 학살했다. 김정태도 그런 피해자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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