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습하다고 얼음 때려넣지 마세요

대서(大暑 7월 23일)입니다. 이름부터가 '큰 더위'를 뜻하니, 달력의 글씨만 보아도 숨이 턱턱 막히고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맹렬한 불볕더위를 상상하며 내심 두려운 마음이 앞섰죠. 하지만 웬걸, 며칠째 장맛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네요.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보아도, 오후가 되어 찻물을 끓일 때도 하늘은 잿빛으로 잔뜩 찌푸린 채 굵은 빗줄기를 끝없이 토해냅니다.
큰 더위 대신 비 내리는 대서
한여름의 정점에, 그것도 큰 더위라는 묵직한 이름표를 단 절기에 며칠째 이어지는 지루한 장마라니요. 뙤약볕 대신 온 세상을 뒤덮은 물안개와 축축한 공기를 마주하며, 절기의 이름과 현실의 날씨가 어긋난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 문헌을 뒤적여보니, 이 며칠째 쏟아지는 장맛비가 영 엉뚱한 불청객만은 아니었습니다. 원나라 시대의 학자 오징(吳澄)이 1년 24절기와 72후(候)의 기후 변화를 꼼꼼하게 관찰하고 정리해 편찬한 <월령칠십이후집해(月令七十二候集解)>를 보면, 대서를 세 가지 절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죠. 첫 번째는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가 나오는 시기(腐草为萤)요, 두 번째는 땅이 습기를 머금고 더위가 찌는 시기(土润溽暑)입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기록했더군요.
"큰비가 때맞춰 내린다(大雨时行)."
이 시기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큰비가 자주 대지를 때리며, 이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무더위가 다소 누그러지면서 계절이 조금씩 입추(立秋)를 향해 건너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문헌의 이 구절을 읽고 나니, 창문을 거칠게 때리는 빗소리가 사뭇 다르게 들려옵니다.
현실은 장마가 끝난 뒤 8월의 진짜 찜통더위가 맹수처럼 도사리고 있겠지만, 지금 며칠째 쏟아지는 이 굵은 빗줄기 역시 대서라는 거대한 자연의 시간표 안에 아주 정교하게 짜여 있는 풍경인 셈이죠. 하늘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큰 더위 속에는 응당 큰비가 품어져 있어야 만물이 목마르지 않고 기나긴 여름을 버텨낼 수 있으니까요.
비 덕분에 기온은 살짝 내려갔을지 몰라도, 공기 중의 습도는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방바닥은 끈적끈적하며,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눅눅하고 텁텁하죠. 한의학에서는 이런 날씨에 몸속으로 차고 끈적이는 '습(濕)'이 파고들기 쉽다고 경계했습니다.
무덥고 습하다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거나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으면, 겉은 시원할지 몰라도 뱃속은 차가워져 비위가 상하고 기운이 처지게 됩니다. 겨울병을 여름에 다스린다는 '동병하치(冬病夏治)'의 오랜 지혜는 바로 이런 축축한 날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랍니다.
이렇게 몸이 무겁고 눅눅한 날에는 차가운 얼음보다 뜨거운 열기로 몸속의 습기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편이 훨씬 현명합니다. 차를 마셔야겠습니다. 대서를 장식할 찻잎은 중국 광둥성에서 온 영덕홍차(英德紅茶)입니다.
펄펄 끓여낸 뜨거운 물을 개완에 붓자, 검고 단단하게 말려 있던 찻잎들이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풀어집니다. 이내 맑고 투명하면서도 깊은 붉은빛의 탕색이 우러나죠. 코끝을 스치는 짙은 맥아향과 달콤한 꿀향, 그리고 농염하게 잘 익은 과일의 풍미가 무겁고 습한 공기를 가르고 번져나갑니다.
홍차와 대만 과자 펑리수
뜨겁게 우려낸 붉은 탕을 한 모금 천천히 넘깁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열기가 서늘해진 뱃속을 어루만지듯 따뜻하게 데워주고, 이내 콧등과 이마에 훅 하고 기분 좋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몸속 깊은 곳에 정체되어 있던 무겁고 찌뿌둥한 기운이 뜨거운 차 한 잔에 개운하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빗소리를 훌륭한 배경 음악 삼아 마시는 이 뜨거운 홍차 곁에는 특별히 대만식 펑리수(鳳梨酥)를 다식으로 곁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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