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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못 지킨 약속...최동원 떠나보낸 부산 야구팬들이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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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못 지킨 약속...최동원 떠나보낸 부산 야구팬들이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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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말, 연세대 졸업을 앞둔 최동원이 실업팀 롯데 자이언트로부터 계약금 5천만 원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이전까지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은 야구선수는 1978년 말에 한양대 졸업을 앞두고 포항제철에서 1200만원을 받은 장효조였다. 불과 2년 만에 4배 이상 불어난 액수였다.

비교 대상을 전체 스포츠로 넓혀 보면 더욱 놀라운 점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와 농구, 배구였고 야구는 그 다음이었다.

그중에서도 축구에 대한 관심이 예나 지금이나 국가대표 팀에만 집중되었고 야구의 인기가 고교 무대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추세였다면, 국내 성인리그로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여자배구와 여자농구였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계약금을 받는 것은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배구와 농구의 여자 선수들이었다. 야구선수가 그해 스포츠를 통틀어 최고액의 계약금을 받은 것은 1980년 겨울의 최동원이 해방 이후 처음이었다.

최고 종목의 최고 선수, 최동원

선수의 몸값은 그 선수의 능력 이전에, 그가 속한 종목과 리그가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위상을 가지느냐에 의해 먼저 결정된다. 한국에서 야구는 1960년대 실업리그가 본격적으로 시작돼 '야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토대를 놓았고 1970년대 고교야구가 지역대결의식의 대리전으로 자리잡으며 대중화했다. 그 사이 급격히 성장한 국민경제는 홍보효과를 노린 기업들이 야구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야구선수라는 직업을 얻기 위해 '밥만 먹고 야구만 했던' 소년들의 첫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김재박과 이선희라면, 그 바로 다음 세대에 최동원이 있었다. 그들이 방과후 활동을 통해 배출된 영재들이었던 윗세대와 차원이 다른 기술을 습득하고 숙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해서 국가대표 명단에 오르면서 한국 야구는 놀라운 성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국이 처음 세계대회에 출전한 것은 1975년 캐나다 멍크턴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였고, 이듬해인 1976년에는 한 단계 높은 권위의 세계선수권대회에 첫선을 보였다. 두 대회에서 한국은 비록 조별 예선을 통과하지는 못했지만 3승 4패와 5승 5패로 선전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한국 단체 구기종목 역사상 처음으로 경험하는 세계 정상이었다.

그 세 번의 대회에서 한국대표팀을 이끈 기둥투수는 프로 원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으로 개막전과 한국시리즈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맞으며 '비운의 투수'로 불리게 되는 이선희였다. 그리고 첫 우승을 달성했던 1977년 대회에 처음 대표팀에 발탁돼 실업팀 선배들에 밀리지 않는 인상적인 활약을 선보이며 한몫 거든 19살 막내 투수가 최동원이었다. 그 최동원이 국가대표팀에서 조금씩 이선희의 몫을 나누어 맡고 또 대체해 가는 동안 야구는 세계무대에서 꾸준히 정상권에 오르며 입지를 다졌고, 고교무대로부터 확산한 인기와 상승 작용하며 드디어 한국 최고의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새로이 떠오른 최고의 인기종목 야구에서, 이미 대학생으로서 국내 최고의 선수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에게 최고의 몸값이 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야구가 기술적 성장과 대중적 인기를 동시에 모으기 시작하던 1970년대에 한국은 가파른 경제성장까지 이루었고, 그 모든 상승 흐름의 정점에서 잭팟을 터뜨린 것이 최동원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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