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녀들의 삶이 궁금하다면, 이 산에 올라보세요
요즘은 어느 지역을 가든 저마다의 이름을 가진 '길' 하나쯤은 품고 있다. 제주 올레길이 그 고요한 시작이었을까. 바다와 돌담 사이를 걷는 그 길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우리에게 천천히 걷는 기쁨과 삶의 속도를 조율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뒤이어 지리산 둘레길이 열렸고, 전국 곳곳마다 숨겨진 이야기를 품은 길들이 핏줄처럼 이어졌다. 걷는 행위가 온전한 운동이자 여행이 되고, 나아가 깊은 사색이 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내가 사는 강화도에도 나들길 코스가 스무 개를 훌쩍 넘는다. 가끔 운동이 필요하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맞고 싶을 때면 언제든 바닷길과 산길, 들길을 나선다. 가만가만 걷다 보면 머릿속을 채우던 복잡한 소음은 가라앉고, 뺨을 스치는 계절의 냄새가 마음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때로는 발걸음마다 서린 역사의 깊은 숨결을 느끼면서 말이다. 가끔 서울로 걸음을 옮길 때면 한양도성길을 찾곤 한다. 웅장하고 오래된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시간의 결이 발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유난히 마음을 두고 자주 찾는 길은 따로 있다. 바로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이말산 둘레길'이다. 이곳을 지난 5월 24일에 찾았다.
구파발역에서 진관사 입구까지 2.5km 남짓 이어지는 이 길은 여느 둘레길과는 공기부터 조금 다르다. 나지막한 흙길은 호젓하고, 깊은 숲은 다정할 만큼 조용하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이름이 이정표처럼 붙어 있다. 바로 '여성테마길'이다.
처음 그 이름을 마주했을 때는 조금 낯설었다. 그러나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그 이름에 담긴 묵직한 무게를 알아채게 된다. 이곳은 다름 아닌, 조선시대 궁녀들의 눈물과 숨결이 묻힌 묘역이기 때문이다. 우거진 숲 사이사이로 이끼 낀 오래된 비석과 석물들이 외롭게 서서, 그들의 삶을 나직하게 대변하고 있다.
궁궐을 벗어난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
그 많던 궁녀들은 죽어서 왜 이말산으로 오게 되었을까. 조선의 궁녀들은 꽃다운 나이에 입궐해 평생을 구중궁궐 담장 안에서만 살아가야 했다. 혼인의 자유도, 궐 밖을 나설 자유도 허락되지 않았던 삶. 자손을 남기지 못한 그들이 숨을 거두면, 시신은 궐과 그리 멀지 않은 이곳 이말산 자락에 묻혔다. 이말산은 갈 곳 없고 연고 없는 궁녀들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거대한 공동묘역이었던 셈이다.
이곳에 잠든 이들 중에는 이름 석 자조차 전해지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다. 모진 세월 속에 비문은 마모 되었고 기록마저 사라져, 누구의 무덤인지 알 길 없는 흙 무덤이 적지 않다. 다만 몇몇 묘비만이 상궁이나 나인 등 그들이 가졌던 신분과 직책을 겨우 증명하고 있어, 당시의 삶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할 뿐이다.
전체 내용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