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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지하 동굴, 시간을 보관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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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지하 동굴, 시간을 보관하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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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루에다(Rueda)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바르셀로나 수산식품박람회와 전시 일정, 그리고 이후의 발효 탐방지들을 챙기느라 바빴다. 고대 로마의 가룸 흔적, 멸치와 소금의 도시, 하몽과 치즈의 산지, 장독 발효와 닮은 세계의 발효 현장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루에다는 그 목록 어디에도 굵게 적혀 있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이름을 제대로 의식한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 여행에는 지도보다 먼저 입맛이 길을 여는 순간이 있다.

바르셀로나 수산식품박람회에서 왕신 우마미부스터와 올리브김치를 선보이던 날이었다. 한국의 멸치액젓과 지중해 올리브, 김치 발효가 낯선 사람들의 입안에서 어떻게 만나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 올리브김치와 함께 낼 산뜻한 화이트 와인이 필요했다. 우리는 숙소 인근 마트의 와인 진열대 앞에 섰고, 깊이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한 병을 골랐다. 그때 손에 잡힌 것이 루에다의 비노 블랑코(화이트 와인)이었다.

처음엔 그저 박람회 테이스팅을 돕는 조연이었다. 올리브김치의 산미와 짠맛을 받쳐주고, 우마미부스터의 감칠맛을 조금 더 가볍게 열어주는 역할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잔을 입에 대는 순간, 와인이 예상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가볍고 산뜻했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청량한 산미 뒤로 허브 같은 기운이 남았고, 어딘가 서늘하고 짭짤한 감각이 혀끝에 오래 머물렀다.

그 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도시의 마트에서도, 식당에서도, 숙소 근처의 작은 술집에서도 우리는 자꾸 비슷한 병을 찾고 있었다. 의식해서 고른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은 어느새 루에다라는 이름 쪽으로 가 있었다. 여행 중 몇 번이고 같은 이름을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처음에는 몰랐던 이름이 어느새 우리의 미각 속에 길을 내고 있었다.

이 산뜻함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잔 안에서 맴도는 청량한 산미와 허브의 기운, 묘하게 짭짤하고 서늘한 여운은 어떤 땅과 어떤 발효에서 온 것인가. 그 질문이 생긴 순간, 루에다는 더 이상 와인병 라벨 위의 낯선 지명이 아니었다. 맛이 우리를 부르는 장소가 되었다.

"그럼 루에다에 가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런 말이 나왔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짜둔 일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의 발효를 찾아서'라는 여정에서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발효를 좇다 보면 늘 그렇게 된다. 목적지는 대개 지도에서 먼저 정해지지 않는다. 어떤 맛, 어떤 냄새, 어떤 질문이 사람을 끌고 간다.

루에다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름도 모르던 와인 산지가 어느새 하루 650km 가까운 길을 달려 찾아가야 할 장소가 되었다. 계획이 없었으므로 새로운 길이 열렸다. 맛이 먼저 도착했고, 우리는 뒤늦게 그 맛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시에라 네바다에서 루에다까지, 650km의 내륙길

그날 우리는 그라나다 시에라 네바다의 고산 숙소에서 길을 나섰다. 해발 높은 산악지대의 찬 공기를 뒤로하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와 그라나다를 지나야 했다. 목적지는 카스티야 이 레온(Castilla y León)의 와인 마을 루에다. 지도 위로는 하루에 달릴 수 있는 경로였지만, 실제로는 안달루시아의 산악지대와 올리브밭, 카스티야의 풍차 언덕, 마드리드 외곽의 거친 교통, 그리고 루에다의 자갈밭 포도밭이 차례로 펼쳐지는 스페인 내륙 종단 여행에 가까웠다.

시에라 네바다 숙소에서 루에다까지는 대략 650km에 가까운 길이었다. 차는 먼저 그라나다 북쪽의 A-44 고속도로를 타고 하엔(Jaén)과 바이렌(Bailén) 방향으로 올라갔다. 안달루시아의 붉은 흙과 올리브밭이 차창 밖으로 길게 흘러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올리브나무의 줄은 마치 낮은 파도처럼 고원과 구릉을 따라 움직였다.

이후 톨레도 쪽으로 방향을 틀자 풍경은 조금씩 카스티야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낮은 구릉과 넓은 평원, 드문드문 나타나는 마을, 그리고 먼 하늘 아래 서 있는 풍차가 길의 리듬을 만들었다. 안달루시아의 햇빛이 조금 더 붉고 뜨거웠다면, 카스티야의 햇빛은 건조하고 넓었다. 도시는 멀어지고, 길은 점점 대륙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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