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이름 줄줄줄 외우는 데는 사연이 있습니다

"환자분, 요즘 드시고 계신 약 이름을 좀 쭉 불러주시겠어요?"
수술 준비를 위해 담당간호사를 만났다. 지금 약이라고 했는가. 입술에 시동을 걸었다.
"저어기, 좀 많은데요. 지금부터 쭉 부를게요. 젤XX, 에XX, 유XXX, 뉴XX,..."
내면의 비트에 몸을 맡긴 채 숨 쉴 틈 없이 약 이름을 불러댔다. 막 여덟 개를 넘어갈 때쯤, 갑자기 간호사가 손을 들었다. 그녀는 타자를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많은 약 이름들을 어떻게 다 외우고 계세요?"
"약 이름 다 부르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이 많은 이름을 다 외우고 계실 줄은 몰랐죠!"
하는 일마다 발목 잡는 병
그렇다. 나는 약 덕후다. 약 이름 외우는 데 이상한 재능이 있다. 약사나 의사냐고? 천만에. 수학과 과학 쪽으로는 철천지원수를 져서 그쪽은 꿈도 못 꿨다. 자가면역질환을 앓은 뒤로 꾸준히 많이 아파왔다. 오래 먹다 보니 이름을 외웠고, 이제는 어느 정도 성분별로 구분할 줄도 안다. 말하자면 별로 갖고 싶지 않았던 종류의 전문성이 생긴 셈이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내가 어릴 적 잘 외우던 것은 자동차 번호판이었다. 아파트 주차장 차들 뒤꽁무니에서 반짝이는 것들이 신기했다. 그래서 꼬부랑거리는 글씨를 어떻게 읽는지 물어가며, 차 이름과 번호판을 세트로 외우고 다녔다. 이를 테면, '403호 아저씨네 차는 쏘나타(SONATA) 1948'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아파트 이웃의 차를 만나면 단박에 알아보고 인사할 정도였다. 영어 파닉스를 자연스레 뗀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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