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방어의 시작은 거절하기... '바운더리' 개념 더 알리고 싶어요"

어릴 적 일본의 실용서를 번역한 호신술 교본이 유행했었다. 어디가 상대방의 급소인지, 갑자기 누군가 끌어안거나 손목을 붙잡았을 때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그림으로 설명한 책이었다. 나한테 이런 상황이 생기면 기억해뒀다 써먹어야겠다 싶었다.
이후에도 호신술은 자기방어라는 이름으로 자주 불려나왔다.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언니네트워크에서였다. 페미니즘을 접목한 자기방어는 신체 훈련이기도 했지만, 일상 훈련이기도 했다. '오지 마세요', '그만하세요' 등의 말로 위험 상황이 시작되기 전에 상황을 내가 통제하는 경험이자, 머리로 아는 것과 다르게 몸으로 기억하는 경험이었다. 한 번이라도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이 좋은 걸 몰랐다니.
바운더리스쿨 삐삐는 '이 좋은' 자기방어 훈련을 위해 설립한 단체다. 여성과 소수자에게 강요하는 성역할에 저항하며 안전과 경계를 심리적, 언어적, 신체적으로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삐삐의 신율을 만난 건 그가 2박 3일 일정의 자기방어 훈련 캠프와 연이은 강의를 마친 직후였다. 신율과 나눈 페미니즘, 자기방어,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삶 이야기.
자기 방어 : 경계를 설정하라!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제주에서 살고 있고요. 제주여민회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고, 동료들과 같이 바운더리스쿨 삐삐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어요."
- 2007년에 처음 여성주의 자기방어 훈련을 접하게 됐다고요. 어떤 프로그램이었어요?
"언니네트워크 페미니즘 캠프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를 만났어요. 10대 청소년을 위한 자기방어 프로그램을 하는데, 기획단으로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있었죠.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재미있어 보이면 무조건 할 때였으니까 얼른 승낙했죠. 10대 소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성별 고정관념에 맞는 움직임이 아닌 것들을 해보는 시간이었어요. 담력을 키운다면서 3M 다이빙 풀에서 떨어져보는 시간도 있었고, 야밤에 산에 오르기도 하고요. 한참 브레이크 댄스가 세상을 휩쓸었을 때여서 여성 브레이크 댄서에게 춤을 배우기도 했어요."
- 이후에는 어떤 식으로 자기방어를 접했나요?
"그 경험이 너무 좋았는데 끝나는 게 아쉬운 거예요. 프로그램에 같이 참여한 친구와 여성 태권도 연맹 사범님들에게 연락해서 시즌 3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했었어요. 그때는 세상에 재미있는 게 별로 없던 시절이라, 16주짜리 프로그램도 사람들이 하러 모이더라고요.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하고는 완전히 놓고 있다가, 귀촌한 친구에게서 지방의 젊은 여성 청년들이 자기방어 훈련을 너무 하고 싶어하는데 와서 가르쳐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예산도 없고 할 사람도 없다면 그냥 내가 가서 하자 싶어서 갔는데 하다 보니까 또 너무 재밌어요. 이걸 전문 강사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배우다가 샌프란시스코에도 간 거죠."
- 샌프란시스코 임팩트 베이에어리어(IMPACT Bay Area. 캘리포니아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비영리 단체. 개인 안전, 경계 설정, 호신술 등을 가르친다) 프로그램이었죠. 거기서 바운더리라는 개념을 배워왔는데, 지금 삐삐의 활동에 기초가 된 것 같아요.
"맞아요. 그전에도 기존 성별 고정관념과 다른 물리적 대응, 말이나 기세는 훈련했지만, 경계라는 개념으로는 자기방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가서는 신체 훈련을 더 하고 싶어었는데 자꾸 경계를 설정하라('set the boundary')는 주문이 오는 거예요. 신체 훈련 중간에도 펜 빌려달라는데 거절하기, 차 빌려달라는 요청에 거절하기 같은 종류의 훈련을 계속하고요. 그때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후에 같이 프로그램을 들은 동기끼리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나중에야 바운더리의 개념을 이해한 것 같아요. 그 개념을 더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페미니스트 활동가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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