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할머니부터 퇴직한 60대까지, 이곳에 모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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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이맘때였다. 쏟아지는 햇살 만큼은 여름 같았던 5월 말, 어느 토요일. 서울 장충동 골목길에 자리한 청화화실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높고 가느다란, 어딘지 조심스러운 목소리의 할머니가 화실의 위치를 물었다. 복지관에서 알려준 대로 찾아오고는 있는데, 여기서부터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화실의 원장 청화(본명 이지혜, 아래 청화)는 지금 계신 곳으로 가겠다며 문을 열고 나섰다. 화실을 나선 지 3분쯤 지났을까. 장충동 주민센터 앞에 허리가 활처럼 굽은 꼬부랑 할머니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다른 손에는 책 한 권을 꼭 쥐고서. 청화가 다가서자 할머니의 얼굴에 먼저 미소가 번졌다.
화실 안으로 들어온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펼쳤다. 청화화실이 만든 '로컬 컬러링북'이었다. 청화와 수강생들, 동네 주민들이 함께 골목을 걷고 오래된 풍경을 그려 복지관에 나눈 그 책. 책장마다 다산성곽길, 약현성당, 남산골한옥마을이 색연필과 형광펜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한 칸 한 칸 끝까지 칠해낸 손끝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거, 내가 다 칠한 거예요."
할머니는 주변에서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이 책을 만든 선생님께 꼭 한 번 자랑하고 싶었다고 했다.
"저 잘했죠?(웃음) 나도 그림 그리면 잘 그리겠죠?"
그렇게 아흔 살 꼬부랑 할머니는 칭찬받고 싶은 아홉 살 소녀가 됐다.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행복했다며 책을 더 사고 싶다는 할머니에게, 청화는 화실을 뒤져 마지막 한 권을 건넸다. 할머니는 다시 소녀가 됐고, 책 한 권을 품에 안은 채 골목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날의 장면은 청화에게 아직도 또렷하다. 칭찬을 기다리던 할머니의 얼굴, 아흔 해를 지나온 손이 한 칸씩 눌러 담은 색들. 그 위로, 그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함께 걷고 보고 이야기하고 그렸던 시간들이 조용히 포개져 있다고.
그날로부터 2년. 문을 연 지 만 4년이 가까워진 청화화실에는 여전히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난생 처음 연필을 쥐고, 누군가는 정년 퇴직 뒤 처음 든 붓으로 넉 달 넘게 풍경 한 점을 채운다. 누군가는 부모님 사진을 '사랑'이라는 그림으로 옮기고, 누군가는 여행의 기억으로 열두 달 달력을 만든다. 완성한 그림은 화실 벽에 걸리고, 엽서가 되고, 동네 카페에 전시된다. 해가 지면 와인 잔을 부딪히고, 재료 공부를 겸해 인사동 골목을 함께 누비기도 한다.
기사 출고 전, 청화와 청화화실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우리 동네엔 이런 화실 없니?"
그림을 매개로 사람들의 삶이 만나고, 동네의 풍경과 주민의 시간이 이어지는 곳. 청화화실과 그곳을 지키는 작가 청화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취재는 지난 5월 15일을 시작으로 19일과 26일, 6월 2일과 9일, 5일간 진행됐다.
찰나의 순간도 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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