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장 탈출한 청년, 미주 독립운동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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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서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양목은 태안 앞바다를 지날 때는 나무처럼 뱃머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향 쪽 바다라도 오래오래 눈에 담고 싶었다. 시야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올망졸망한 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손을 느슨하게 묶어 준 아랫마을 청년, 제물포행 중선에 태워 준 최 씨, 백화산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본문 37~38쪽 중에서-
「'근면, 성실, 인내…… 그리고 조국의 독립.' 양목은 이 단어들을 종이에 적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양목은 펜을 들고 교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밤은 깊어 갔지만 양목의 펜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본문 160~161쪽 중에서-
충남 태안군 출신이면서 평생 '독립운동을 신앙처럼' 여긴 불세출의 미주항일애국지사인 우운 문양목 지사가 광복 80주년을 맞은 지난해 8월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고국의 품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문 지사의 유해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내 '국외 유해봉환 독립유공자 묘역'에 본부인 김씨와 이찬성 여사와 함께 묻혀 있다. (관련기사 : 문양목 지사 유해, 순국 8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문양목(文讓穆, 1869년 6월 7일~1940년 12월 25일) 지사는 충남 태안군 남면 몽산리 출신으로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해 1907년 하와이로 피신하고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를 결성해 대동공보를 간행했다.
1908년 7월에는 한인소년병학교 사관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을 지원했으며, 1910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군인 양성운동과 지방총회 설립 활동을 펼치는 등 1940년 12월 25일 71세를 일기로 순국 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부는 우운 선생의 해외 항일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해 지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지난 2004년에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문양목 지사에 대해 '문양목 평전'을 저술한 최재학 작가는 "문양목 선생은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 뒤 "국내에서는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이민 초기 안창호의 공립협회와 함께 미 본토의 대표적인 국권회복단체인 대동보국회와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장을 역임하면서 그 회의 기관지의 주필 겸 사장을 역임하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1908년 3월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샌프란시스코 의거에 깊숙이 관계하면서 미주지역에 강력한 독립운동을 펼쳐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에게 한국인의 강인한 독립의지를 확인시켰다"고 상징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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