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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독립영화 관행 부수고자 의기투합한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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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독립영화 관행 부수고자 의기투합한 남녀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전공자를 위한 지역 미디어센터 영화 시나리오 워크숍. 유독 튀는 두 수강생이 있다. 강사와 동료 수강생들의 피드백을 수렴하는 시간에 둘은 골칫덩어리다. '구한아'는 남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지구 최후의 여자> 시나리오를 고수한다. 뭔가 사연이 있는지 독기를 품은 그녀 앞에서 다들 감히 건드릴 엄두도 못 내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감독 지망생 '송철'만 왜 그렇게 남성 혐오에 집착하냐며 의견을 낸다. 강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다.

그런 송철의 시나리오 역시 강사에겐 한숨만 거듭 나올 따름이다. '독립영화 제작기를 독립영화로 만들어 독립영화제에서 독립영화인이 절대다수인 관객 앞에서 상영하고, 그들과 함께 뒤풀이하러 가는' 행태가 진저리난다며 상업영화 스타일에 치우친 누아르 복수극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내 공모전에 낙방하자 그는 나름대로 묘안을 짜낸다. 독립영화 지원사업 평가 기준에 포함된 여성 가산점 확보차 한아에게 협업을 제안한 것. 오월동주도 이런 게 없다.

상극인 두 사람

<지구 최후의 여자>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상극인 두 사람이 협력하는 이야기다. 처음엔 극악의 상성이지만, 묘하게 둘은 계속 부대낄 운명이다. 요즘처럼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상종하지 않는 시절에 희귀한 인연이긴 하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보면 한 사람은 너무나 속이 투명하고, 다른 사람은 사연이 꽤 깊은 듯하다. 송철이 겉으로 내세운 의도는 극한의 실용주의다. 번번이 지원사업 낙방이라 가산점 덕 좀 보겠다는 것. 한아로선 기가 차는 노릇이다.

한데 단칼에 거절할 줄 알았던 그녀는 3가지 조건을 걸다가 할인까지 해주며 협업을 승낙한다. 어차피 혼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으니 파트너가 필요하던 참이라 한아 역시 실용주의로 전환한 걸까? 며칠 앞으로 다가온 워크숍 강평을 앞두고 통 진도가 안 나던 송철의 시나리오부터 개조하기로 한다. 둘은 계속 붙어 다니며 갑론을박을 거듭한다. 남성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는 여자 vs. 요상한 복수극에만 몰두하는 남자의 동업은 순탄할까?

물론 그렇진 못하다. 애초 송철의 의도가 불순한 데다, 어설픈 마초남 행세하는 족족 상대에게 질타당할 뿐. 점점 한아는 그의 기묘한 집착에 의문을 품고 송철 역시 무슨 한 맺힌 게 있나 집요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입을 연 송철에게 자신과 같은 상대에게 상처를 받은 과거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때 한아가 홀연히 사라진다. 어떻게든 그녀를 찾으려는 송철의 집요한 노력이 이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재회한다. 과거에 발목 단단히 잡힌 그들은 다른 인생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어야 하기에 뜻을 합친다. 각자 품던 영화를 향한 열망이 질곡이 된 현재, 이를 떨치기 위해서라도 둘은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마치 씻김굿을 벌이듯 두 사람은 그들을 도탄에 빠트린 '탁' 감독의 만행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다. 힘을 합쳐 행방을 수소문하며 영화가 완성되면 지긋지긋한 속박에서 탈출할 수 있길 기대한다.

쉬쉬하던 영화계의 어둠과 정면승부

<지구 최후의 여자>는 역설적으로 작중 송철이 지긋지긋한 한국 독립영화 관행에 대해 열을 올려 비판하는 범위 안에 해당 작품 역시 풍덩 빠져들어 있다. 어찌 보면 자전적인 내용이다. 영화 안에서 제작진 위주로 자신들의 소요에 입각해 대중은 후속 순위로 미뤄둔 채 영화를 만드는 분투기가 중심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처음엔 전혀 다른 영화관을 가진 듯 보이던 구한아 & 송철은 실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었던 것.

이야기의 시작점은 음울하다. 주인공들은 영화를 동경하며 인생을 걸어보려 했으나, 그들이 꿈꾸던 것과 현실은 극명하게 달랐다. 탁 감독은 배우지망생인 한아에겐 선정적인 노출 연기를 주문하고, 연출지망생인 송철은 하인처럼 부리며 제자의 아이디어를 자기 영화에 도용하길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인맥 많고 명성 있던 감독은 예술가로 명성을 드높였으나 부품처럼 이용당한 둘의 울분은 출구를 찾지도 사과를 받지도 못했다.

초반에 상극이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 역시 바깥에서 포착하기 힘든 독립영화판 어두운 이면을 성토하면서부터다. 대기업 복합상영관의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에서 왜곡된 시장은 신진 작가의 진입을 어렵게 한다. 대중에게 검증 기회를 얻지 못한 독립영화는 공적 지원제도와 영화제 출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바늘귀' 통과에 비견되는 각종 지원사업, 여기 목매는 창작자가 워낙 많으니 여성영화 가산점에 '불공정'이라며 불필요한 성별 대결이 조장된다.

독립영화계 속사정에 익숙하다면 여러 번 들어봄 직한 내용이다. 오랜 기간 계속된 논쟁에도 해결은 요원하다. 차라리 선악이 무 자르듯 구분되면 좋으련만, 고생 끝에 마침내 찾아낸 탁 감독이 대단한 힘이란 게 없으며 투자자 눈치나 보는 신세였다. 한 번 일그러진 시스템 자체가 후속 세대의 생기를 빨아먹는 괴물로 고착된 상황. 종종 푸념하는 장면은 나와도 거칠게나마 이만큼 직진하는 작업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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