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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에서 마포까지 빼곡...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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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에서 마포까지 빼곡...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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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탄생은 다분히 인위적이다. 분지에 도성을 조성하면서, 한가운데로 흐르던 작은 물길을 더 넓고 깊게 파냈다. 그래서 개천(開川, 청계천)이라 불렀다. 도성 위생과 치안의 핵심이었고, 장마철마다 범람하기 일쑤니 꾸준한 관리 대상이었다. 지난 18일, 이곳 청계천 일대를 다녀왔다.

초기 세종 때까진 치수 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그러다 오래 방치한다. 흙이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른다. 영조가 준설 한다. 이때 파낸 흙을 오간수문 근처에 쌓아둔다. 가산(假山)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많은 흙을 파냈는지 짐작이 간다. 양안은 돌 축대를 쌓아 물길을 편다.

준설로 문제가 해결되나, 동시에 부작용도 생겨난다. 쌓인 흙은 악취는 물론 비옥하지도, 단단하지도 못했다. 비가 내리면 다시 개천으로 흘러들었다. 그 가산이 일제강점기 때 흙 쌓는 토사로 반출되어 사라진다.

망국은 곧 개천의 방치였다. 개천 양안은 홍수 염려로 빈 땅이 많았다. 그 땅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시장으로 변모한다. 광장·방산시장이 대표적이다. 개천 복개 시작과 더불어 해방을 맞는다. 해방 이후 개천을 급격히 잠식한 판잣집은 결코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다. 이로써 감당키 어려울 만큼 슬럼화 하였다. 관성의 가속화였고, 오래 누적된 도시 문제의 직접적 표출이었다.

낮은 곳으로

해방 후 서울은 수도라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 다름 아니었다. 국정은 미군정 손아귀에 있었고, 주택은 일제 말기 공습과 파괴로 급격히 멸실 된 뒤였다. 그러나 인구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급속도로 늘어났다.

중국과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들이 돌아온다. 식량은 바닥을 긁어댔다. 곤궁의 일상이다. 굶어 죽지 못해 상경한 농촌 인구 또한 엄청났다. 문제는 이들이 먹고 잘 합법적 공간도, 그럴만한 행정력도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념 대립이 오히려 이런 문제를 앞서 나갔다.

기존 주거지는 포화 상태다. 이름마저 살벌한 적산(敵産)가옥은 죄다 친일파 차지다. 일제로부터 놓여난 토지 소유 관계는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사유지가 높고 거친 울타리로 막힌다. 서울로 몰려든 이들은,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국가 소유 땅으로 자연스레 휘몰렸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이 개천이었다. 사유지가 아니었고 경계도 모호했으며, 상시 거주를 전제로 한 점유 공간도 아니었기에 감시 눈초리도 덜했다. 무엇보다 소유권으로부터 내몰림이 없었다. 먼저 찾아 들어 점용하면 그만이었다.

범람하는 홍수는 연례 행사였고, 온갖 쓰레기와 하수는 일상이었다. 악취는 물론 전염병 감염 위험에 내놓였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안온함도 드물었다. 그 불안정이 정착의 제1요소였다. 행정 통제는 느슨했고, 둔치는 비어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철거될 위험이 낮았다. 사람들은 계획 없이 집을 지어댔다. 미군 군수품 상자, 함석, 포대, 철사로 엮은 구조물이 개천을 따라 잡초처럼 자라났다.

한강보다 개천이 서울의 상징이던 시대였다. 개천 둑길을 따라 생존 띠와 경로가 길게 형성되었다. 가장 낮은 곳이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땅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몰려들었다.

높은 곳으론 가기도 힘들었고 가도 가장 먼저 단속의 표적이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개천은 선택지가 아니라 남아 있던 유일한 여지(餘地)임이 분명했다. 당시 서울이란 공간은 남산·낙산·북악산·인왕산이라는 내사산(內四山) 안쪽에 한정하여 인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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