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 '용기 모자'를 쓰게 만드는 책

주방 일을 하며 귀로 책을 읽는다. 오디오북 너머로 들려오는 이미화 작가의 에세이 <삶은 어느 순간 영화 같아서>는 마치 오랜 친구가 곁에서 말하듯이 편안하게 스며들었다. 쉽게 읽히지만, 마음에 남는 감동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영화 처방사이자 책방을 운영하는 저자는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길을 잃을 때마다 자신을 붙잡아준 영화 이야기를 다정하게 건넨다. 책을 듣는 내내 화면 속 영화 장면들은 이내 내 지나온 삶의 필름과 겹쳤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당황할 필요는 없다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대요." - 영화 <런치 박스> 중에서
책 속에서 만난 이 한 문장은 조급했던 마음을 단숨에 가라앉혔다. 우리는 늘 정해진 시간에 정확한 목적지로 가는 기차만을 '정답'이라 여긴다. 하지만 조금 돌아가면 어떤가.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생각지 못했던 의외의 풍경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오래 몸담았던 정든 교정을 떠나 퇴직이라는 새로운 간이역에 내린 지금, 문득 내가 탄 기차를 돌아본다. 때로는 흔들렸고, 때로는 경로를 이탈한 게 아닌가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소풍이 끝나는 날은 누구에게나 같다. 서둘러 내릴 필요도, 자책할 필요도 없다. 왠지 불안해지는 지점에서 조금만 더 참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나올 테니까.
인생을 살며 타인에게 길을 안내할 때 "조금 즐거워지려고 하는 지점에서 5시 방향으로 꺾으세요"라고 무심하게 말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싶어졌다.
묵묵히 걸어온 시간, 그 자체가 최고의 작품
저자는 영화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를 통해 진짜 '삶의 정수'가 무엇인지 묻는다. 시사 잡지 <라이프>의 평범한 필름 관리자 월터는 사라진 마지막 표지 사진인 '25번 필름'을 찾아 전 세계를 헤매지만, 마침내 베일을 벗은 표지 사진은 역사적 영웅이나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회사 앞 벤치에 걸터앉아 묵묵히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실에서 평생을 바쳐온 월터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가슴이 먹먹 해지는 대목이었다. 숀이 말한 삶의 정수란 에베레스트 꼭대기 같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는 평범한 이들의 모든 순간 그 자체였다. 어느 한 분야에서 소리 없이 자기 소명을 다해온 모든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이자 최고의 작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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