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후 마취 늪에 빠진 엄마, 정신들게 한 목소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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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으로 향할 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자 세상에 아프고 힘든 사람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더군요. 수술실 앞에서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두 시간 남짓이 마치 백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수술 전날부터 멀리 전주에서 온 이모와 서울 사는 막내 이모까지 큰언니를 찾아왔습니다. 자매들이 똘똘 뭉쳐 미리 생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큰언니의 혼을 쏙 빼놓았죠. 양손 가득 맛있는 걸 들고 들어온 동생들은 쉴 새 없이 왁자지껄 떠들며 엄마가 다음 날 있을 수술을 아예 생각조차 못 하게 만들었습니다. 큰언니를 향한 동생들만의 애틋하고도 요란한 위로 방식이었어요. 그 다정하고 소란스러운 공기 덕분에 일렁이던 엄마의 긴장감도 금세 따스하게 녹아내렸습니다.
마침내 수술실 문이 열렸습니다. 엄마를 인계하며 의료진이 아주 단호하게 당부하더군요.
"환자 분 지금 잠들면 안 되니까 계속 깨우셔야 해요!"
잠을 푹 자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한마디에 모든 상황이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엄마는 깊고 어두운 마취의 늪에서 좀체 빠져나오지 못하셨거든요. 의외로 잘 일어나지 못하고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보며, 제 마음 속에서는 와르르 거대한 도미노가 무너지는 듯한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저는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엄마를 부르며 흔들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리는 큰언니를 보며 동생들도 "언니, 눈 떠봐!" 하고 애타게 소리쳤어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 익숙하고 간절한 부름에 엄마가 눈을 번쩍 뜨시더군요. 깊은 안개 속을 헤매던 엄마를 밝은 빛으로 단숨에 끌어올린 건, 다름 아닌 동생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가 마취의 늪을 뚫고 들어간 가장 강력한 동아줄이었던 셈이죠.
하지만 엄마는 자꾸만 다시 잠의 늪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는 계속 그곳으로부터 엄마를 꺼내와야 했고요. 긴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마침내 안정을 찾고 처음으로 병상을 벗어나 걸음을 내디뎠을 때, 제 가슴을 채운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안도와 눈물겨운 감사였습니다.
엄마의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준비한 것
병실을 퇴원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저는 엄마의 온전한 회복을 축하하고 지친 심신을 위로하기 위해 아주 특별한 차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어떤 잔을 꺼낼까 고민하던 제 시선이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쨍한 노란빛의 빈티지 찻잔에 멎었습니다. 수십 년 전, 엄마가 시집올 때 한 친구에게서 결혼 선물로 받았다는 세월의 유물이었죠.
잔을 꺼내어보니 안쪽에 그려진 화사한 꽃무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문득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일곱 남매를 훌륭하게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화폭에 등장하는 들꽃들은 결코 거만하게 자신을 뽐내지 않습니다. 척박한 마당 한구석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기어코 작은 꽃망울을 피워내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생명력.
그것은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억척스럽게 삶을 일구고, 이번 수술의 아픔마저 이겨낸 우리 엄마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습니다. 우리 남매에게 엄마는 그 누구보다 위대하고 훌륭한 신사임당이십니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굳건히 뿌리내린 원추리꽃 곁으로 폴짝 뛰어오를 듯한 개구리 한 마리와 나비, 잠자리, 여치가 평화롭게 노닐고 있습니다. 이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들의 어울림은 마치 수술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큰언니를 깨우던 이모들의 왁자지껄한 사랑 같기도 하고, 엄마의 너른 품 안에서 지지고 볶으며 자라난 우리 남매들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엄마라는 단단한 풀꽃이 비바람을 견디며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었기에, 우리라는 작은 생명들이 그 그늘에서 이토록 생기 넘치게 뛰어놀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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