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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리모컨 대신 한 모금, 온몸이 서늘해지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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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리모컨 대신 한 모금, 온몸이 서늘해지는 방법

여름은 무엇보다 햇빛의 농도와 바람에 섞인 물의 농도로 우리 곁에 당도합니다. 창문을 열면 훅 끼치는 공기의 무게가 점점 묵직해지고, 잎이 넓어진 나무들은 제법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죠.

절기상으로 초여름에 접어드는 이맘때가 되면, 달력 위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두 개의 굵직한 날이 나란히 놓입니다. 바로 음력 5월 5일 단오(端午, 6월 19일)와 양력 6월 하순경에 찾아오는 하지(夏至, 6월 21일)입니다. 단오의 풍경을 떠올릴 때면 1882년 북관(北關)으로 유배를 떠났던 조선의 문인 정윤영(鄭胤永)의 시 <단오(端午)>를 가만히 곱씹게 됩니다.

곧 찾아올 태양의 맹렬한 기세

夏五留連關外客 (여름 오월, 변방 밖에 오래 머무는 손님)

秋千擾亂巷西童 (골목 서쪽에서는 아이들이 요란하게 그네를 뛴다)

菖蒲葉底溶溶水 (창포 잎 아래로는 물이 질펀하게 흘러가고)

楊柳枝頭澹澹風 (버드나무 가지 끝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인다)

- 정윤영(鄭胤永), <단오(端午)> 중 일부, 1882

변방에 묶인 유배객의 눈에 비친 단오는 쓸쓸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칩니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왁자지껄하게 그네를 뛰고, 창포 잎 아래로는 맑은 물이 넉넉히 흘러가며, 버드나무 끝에는 초여름의 부드러운 바람이 붑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시의 끝맛은 조금 깐깐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그는 '이날 묘소에 제사 지내는 일은 도리어 지나치게 후한 데 빠졌구나(此日祭墳還失厚)'라며 일침을 가하거든요. 명절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도 허례허식을 경계하는, 아주 꼿꼿하고 점잖은 성리학자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그 딱딱한 잣대를 잠시 거두고 혜원 신윤복의 화첩 속 <단오풍정(端午風情)>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그 시절 단오가 얼마나 아찔하고 펄떡이는 생명력으로 가득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들은 깐깐한 선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계곡 맑은 물에 찰랑찰랑 창포물로 멱을 감고, 땋아 내린 굵은 트레머리를 손질하느라 여념 없죠. 화면 한가운데서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거대한 그네에 몸을 실은 여인의 자태는 다가올 뜨거운 여름을 향해 돌진하는 단오의 맹렬한 에너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단오가 향기로운 풀냄새가 나는 물로 몸을 씻고 붉은 치마를 펄럭이며 다가올 무더위를 '대비'하는 역동적인 시간이었다면, 며칠 뒤 찾아오는 '하지(夏至)'는 태양의 맹렬한 기세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인내의 시간입니다.

1년 중 낮이 가장 길고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하지는 양기(陽氣)가 그야말로 폭발하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이 뜨거운 날을 무작정 차가운 얼음으로만 쫓아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 철학에서는 만물이 극에 달하면 반대의 기운이 생겨난다고 보았기에, 하지가 지나면 땅속에서 서늘한 음기(陰氣)가 조용히 태동 한다고 믿었죠. 그래서 극에 달한 열기 속에서도 바깥 기운에 흔들리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고 내면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스스로 서늘해진다는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에어컨 리모컨 하나면 모든 계절이 평정 되는 요즘, 단오의 펄떡이는 생명력도 하지의 고요한 인내도 모두 옛말이 되었습니다. 그저 "아, 오늘 진짜 덥네" 한마디 툭 던지고 리모컨 한 번 누르면 금세 시원해지니까요. 이 짙은 계절을 쉽게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묘한 오기가 발동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산에 차린 찻자리

'신윤복 그림 속 여인들처럼 붉은 치마 펄럭이며 그네는 못 타더라도, 산바람 맞으며 제대로 된 야외 찻자리라도 폼나게 펼쳐보자!'

'가장 긴 낮의 열기를 차 한 잔으로 고요히 식히던 옛사람들의 그 감각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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